코로의 젊은 동료들은 그의 조용한 화법을 사랑하고 찬미했으나 그를 추종하지는 않았는데, 그것은 주제에 관한 인습 때문이었다. 당시 아카데미는 고상한 그림은 고상한 인물을 담아야 하며, 노동자나 농민은 네덜란드의 전통적인 풍속화에나 어울린다고 믿었다. 하지만 1848년 2월 혁명에 이르러 프랑스의 바르비종이라는 마을에 모인 화가들이 새로운 시각으로 자연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장 프랑수아 밀레가 그 중 한 사람이다.
장 프랑수아 밀레
밀레는 이 새로운 시각을 인물화로까지 확장하여 농부들의 진솔한 생활 모습과 그들이 들에서 일하는 장면을 그리려 했다. 그 이전까지 농부들의 모습은 우스꽝스럽게만 그려져 왔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그의 그림을 혁명이라 칭하는 것도 과하지 않을 것이다. 밀레의 유명한 작품인 이삭 줍는 사람들을 보면, 세 명의 농부가 들판에서 한창 추수 중인 모습을 담고 있을 뿐 어떤 극적인 사건 같은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는 인물의 윤곽선을 단순하면서도 견고하게 묘사해, 햇살이 내리쬐는 눈부신 들판과 대비시켜 그럴듯한 자연스러운 품위를 부여했다.
쿠르베와 사실주의
구스타브 쿠르베는 이러한 운동에 사실주의란 명칭을 부여했다. 그의 사실주의는 미술에서의 혁명을 뜻하는 것으로 그는 오직 자연의 제자이고자 했다. 안녕하십니까, 쿠르베 씨라는 그의 작품은 관전파의 작품에 익숙한 이들에겐 유치해 보였을 것이다. 이 그림의 꾸밈없는 구도는 심지어 밀레의 이삭 줍는 사람들의 구성조차 계산적으로 보이게 만든다. 더불어 그림 속, 자기 모습을 셔츠 차림의 부랑아처럼 묘사한 것도 사람들에게 충격을 주었다. 이 모든 것들은 자신의 그림이 당시의 인정받던 인습에 대한 항의로써, 타협하지 않는 예술적 순수함을 선언하고자 했던 쿠르베의 의도였다. 이러한 쿠르베의 노력은 다른 미술가들을 고무하여 인습을 경멸하고 자신의 예술적 양심만을 따르도록 도왔다.
영국의 라파엘 전파
하지만 영국은 전혀 다른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들은 왜 미술이 이처럼 위험한 상황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 고민했고, 아카데미 화가들이 라파엘로의 전통을 계승한다고 주장한다는 점에서, 미술은 라파엘로로부터, 라파엘로를 통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 따라서 미술을 개혁하기 위해, 미술가들은 하느님께 정직하며, 하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해 자연을 모사했던 시절로 되돌아가야 했다. 이러한 뜻을 같이한 이들은 자신을 라파엘 전파라 칭했다.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는 이들 중 가장 훌륭한 화가로 꼽힌다. 그의 작품, 수태 고지를 보면 중세적인 표현 방식이 아닌 중세 거장들의 정신을 따르고자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의 태도를 본받아 로제티는 경건한 마음으로 성경 속 장면, 천사가 마리아에게 인사하는 장면을 형상화하고자 했다. 그는 단순함과 순수함을 추구하며, 참신한 시각으로 성경을 볼 수 있게 하려고 노력했다. 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라파엘 전파의 목표 자체는 사실 결코 도달할 수 없는 이상과 다름없었다. 이상을 현실화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인습에서 벗어나 눈에 보이는 세계를 탐구했던 동시대 프랑스 화가들의 노력이 후대에 더 큰 결실을 보았다.
눈으로 '본' 그림
프랑스 미술의 다음 혁명은 에두아르 마네와 그의 친구들에 의해 시작됐다. 그들은 이전 혁명의 기수였던 쿠르베의 주장을 신중하게 검토했고, 진부하고 무의미해진 회화의 인습이 무엇인지 찾고자 했다. 그리고 전통 미술이 발견한, 자연을 묘사하는 방법은 모두 인공적인 조건에서만 그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밝혀냈다. 아카데미의 학생들은 모두 전통 미술에 기반한 명암의 상호 작용에 기초하여 교육받았고, 모든 물체에 이 명암을 적용했다. 이러한 방법에 익숙한 대중 역시 밝은 햇빛 아래의 명암이 그림 속 모습과는 다르다는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다. 실제로는 햇빛을 받는 부분은 실내에서보다 훨씬 더 밝게 보이고 그림자도 주변의 대상들로부터 반사된 빛에 의해 회색이나 검은색으로만 나타나지 않는다. 우리의 눈을 믿고, 사물을 이렇게 보아야만 한다는 규칙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그야말로 새로운 단계로의 진입을 할 수 있는 것이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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