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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59

19C 후반 고갱의 열망과 야만적인 예술 고갱과 고흐의 짧은 인연 세잔과 고흐의 뒤를 이은 또 다른 화가, 폴 고갱이 1888년 남프랑스에 나타났다. 고흐는 영국의 라파엘 전파 안에서 이루어진 화가들 간의 우정을 선망하며, 고갱과 친분을 쌓기를 꿈꿨다. 결국 고흐는 자신보다 다섯 살 위인 고갱을 설득하여 아를에서 함께 지내게 되었다. 사실 둘은 인간적인 면에서 서로 매우 달랐다. 고갱은 고흐가 가지고 있던 겸손함이나 사명감 따위는 없었으며 오만하고 야심만만한 사람이었다. 그런데도 두 사람의 공통점이 아예 없던 것은 아니었다. 고흐와 마찬가지로 고갱도 늦게 화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고, 거의 혼자 그림 공부를 했다. 하지만 이 둘의 우정은 비극으로 끝났다. 발작적인 정신착란을 일으킨 고흐가 고갱에게 달려들었고, 고갱은 그 길로 파리로 도망친 것이다.. 2022. 6. 4.
19C 후반 고흐의 삶과 감정을 전하는 예술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비극 1888년 겨울, 쇠라가 한창 파리에서 주목받고 있을 무렵, 남국의 강렬한 햇살과 색채를 찾아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로 온 한 네덜란드 화가가 있었다. 그는 바로 빈센트 반 고흐였다. 반 고흐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과 벨기에의 광산촌에서 전도사로 일할 만큼 신앙심이 깊었는데 밀레의 작품과 작품에 담긴 사회적 교훈에 감명받고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를 인상파 화가들에게 소개해 준 것은 그의 동생 테오였는데, 테오 역시 가난했지만, 항상 형 빈센트를 성심껏 도왔고 남프랑스의 아를로 가는 여비도 그가 마련해 주었다. 빈센트는 방해받지 않고 몇 년간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언젠가는 그림을 팔아 동생에게 그 은혜를 갚을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의 모든 .. 2022. 6. 3.
19C 후반 세잔의 승리와 쇠라의 또 다른 도전 비평가들은 세잔 미술의 성공에 대해 어떤 비밀이 있는지 갖가지 종류의 설명을 시도했지만, 그 시도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다. 비평가들에게서 답을 찾을 수 없더라도 작품은 언제나 우리에게 최선의 이야기를 해주기 마련이다. 세잔의 승리가 어떤 위대함을 가지고 있는지 이해하기 위해 그의 그림을 들여다보자. 세잔의 승리와 그의 그림들 남프랑스의 생트 빅투아르 산을 그린 풍경화는 빛을 가득 머금고 있으면서도 명확함과 견실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다. 명료한 화면 구성에 깊이감과 거리감이 확실히 느껴지며, 수평적 묘사와 수직적 묘사가 절묘하게 어우러져 질서와 평온함 역시 가지고 있다. 붓놀림조차 화면의 주요 선들과 일치하여 그림의 조화를 강화한다. 세잔은 주도면밀하게 붓놀림의 방향을 조절하여 자칫 화면 위쪽에 생길뻔한.. 2022. 6. 2.
19C 후반 새로운 문제 인식과 세잔의 노력 새로운 문제점을 인식하고 해결하려 했던 폴 세잔 새로운 문제점의 본질을 최초로 분명하게 인식한 인물은 폴 세잔이다. 인상파 대가들과 같은 세대에 속한 그는 젊은 시절, 인상파 화가들의 전시회에 참가했지만, 그들을 향한 평판에 염증을 느끼고 고향으로 돌아가 자신의 예술에 몰입했다. 그는 자신 스스로 제기한 예술적 문제점들을 해결하는데 일생을 바칠 수 있었는데, 자신의 그림을 사줄 고객에 구애받지 않을 만큼의 독자적인 수단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평온하고 한가한 삶을 산 것처럼 보이지만 자기가 추구했던 완벽한 예술적 이상을 자기 작품 속에 이룩하기 위해 끊임없이 투쟁을 이어갔다. 소수의 숭배자에게 명성을 얻기 시작하자 이론적인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음에도 드물지만, 그들에게 자기가 하고.. 2022. 6. 1.
19C 후반 유럽 미술과 아르 누보 겉으로 볼 때 19세기 말은 대번영의 시기였으나 자신을 아웃사이더라고 느낀 미술가와 작가들은 대중의 입맛에 맞는 예술의 목적과 방법에 점차 불만을 가졌다. 그중 건축은 그들에게 가장 쉬운 공격 대상이었다. 공허한 틀에 박힌 형태로 발전한 건축은 그 건물의 목적과는 전혀 관계없는 잡다한 양식으로 지어졌다. 짓고자 하는 건물에 뼈대를 세운 뒤, 역사상의 양식을 모아놓은 책자에서 하나를 골라 건물 정면을 장식하여 약간의 예술성을 더하는 방식에 대다수 건축가는 오랜 기간 만족하고 있었다. 건축가들은 대중의 요구에 철저히 부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19세기 말에 이르자 사람들은 점차 이러한 방식이 불합리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특히 영국의 비평가와 미술가들은 산업혁명으로 인해, 과거엔 그 자체로 의미와 기품을.. 2022. 5. 30.
19C 분야와 지역을 넘어 전파된 인상주의 드가의 구도와 소묘 에드가르 드가는 이러한 가능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모네나 르누아르보다 다소 나이가 많았던 드가는 인상주의자들의 목표에 대부분 동감하면서도 그 그룹과는 약간 거리를 뒀다. 앵그르를 대단히 존경했던 그는 구도와 소묘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가장 의외의 각도에서 본 공간과 입체감 나는 형태들의 인상을 전달하려고 한, 그의 의도를 알 수 있다. 확실히 그가 옥외 장면보다 발레 장면을 주제로 삼는 걸 좋아했던 이유를 미루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발레 연습 장면을 보며 매우 다양한 자세와 인간의 신체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드가는 위에서 아래로 무대를 내려다보며 인체에 입체감을 주는 무대 조명의 효과와 미묘한 단축법을 연구했다. 그가 그린 파스텔 소묘 중 한.. 2022. 5. 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