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의 미술 속 이집트인의 생활
이와 같은 규칙을 이해하고 나면 우리는 이집트인들의 생활사가 기록된 도판들을 읽어낼 수 있다. 도판의 일반적인 구성을 보면, 상형 문자로 새겨진 명문과 그림으로 거의 여백 없이 채워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상형 문자로 새겨진 명문은 그가 누구였으며, 살아있었을 때 어떤 지위와 명예를 누렸는지를 말해준다. 그림 속 사람들은 그 지위에 따라 크거나 작게 표현되었고, 그 모습을 통해 이집트인들의 생활을 엿볼 수 있다. 물론 그 그림은 그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보여주는 방식으로 그려졌다. 창으로 물고기를 잡는 장면을 확실히 보여주기 위해 물이 갈대밭 위로 올라온 것처럼 보이게 그려, 창에 꿰인 물고기의 모습을 분명히 보여주는 식으로 말이다.
우리가 이러한 이집트 그림을 보는 데 익숙해지면, 그 그림들의 비현실성에 더는 신경을 쓰지 않게 될 것이다. 오히려 그들의 화법이 가진 장점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이 그림들 속에 어떤 것도 우연히 그려진 것은 없으며, 지금 그려져 있는 곳이 아닌 다른 곳에 그려져 있어야 했다는 인상을 주는 것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연필을 꺼내 이집트의 그림 하나만 모사해 봐도, 우리가 그린 그림은 서툴고, 한쪽으로 치우쳐 뒤틀려 있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이것은 이집트인들의 철저한 질서 감각에 기인한 것으로, 이집트 미술가는 벽면에 그물 모양의 직선들을 그려 넣는 것으로 작업을 시작하며, 이러한 선상에 인물들을 조심히 배치한다. 그들은 이러한 기하학적인 질서 감각을 유지하면서도 그리고자 하는 대상의 세부를 표현하는 것도 놓치지 않았다.
이집트 미술의 양식
이집트 미술의 가장 위대한 점 중 하나는 모든 조각, 회화, 건축의 형식들이 마치 한 가지 법칙에 따라 배치된 것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규칙을 양식이라고 부른다. 모든 이집트 미술을 지배하는 규칙들은 각각의 작품에 균형과 엄숙한 조화를 느끼게 한다. 대단히 엄격한 법칙들로 구성된 이집트 양식을 모든 미술가는 어려서부터 배워야만 했다. 또한 상형 문자의 형상과 상징을 명확하고, 정확하게 돌에 새길 수 있도록, 아름다운 문자 필기도 배워야만 했다. 이러한 규칙들을 완전히 터득하게 되면, 미술가의 수습 생활은 끝났지만, 아무도 그가 배운 것과 다르게 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고, 또한 그것을 요구하는 사람도 없었다. 오히려 가장 뛰어난 미술가는 과거에 추앙을 받았던 기념비들과 가장 비슷한 조각을 만들 수 있어야만 했다. 이런 이유로 3천 년이 넘는 시간이 흘러도 이집트 미술은 아무런 변화도 없었다. 새로운 유행이 생겨나고 미술가들에게 새로운 소재들이 요구되었지만, 그들이 인간과 자연을 표현하는 방법은 본질적으로 동일했다.
이집트 미술 양식의 일시적 해방
이런 이집트 양식의 철칙들을 뒤흔들어 놓은 유일한 사람이 나타났다. 그는 이집트가 파국적인 침략을 받은 후에 건설된 '신왕국'으로 알려진 제18왕조 시대의 왕으로, 아멘호테프 4세는 이단자였다. 그는 오랜 전통에 의해 숭상되어온 많은 관습을 타파했다. 그는 백성들이 믿는 많은 신에게 경의를 표하지 않았다. 그에게 있어 유일한 신은 최고의 권위를 가진 아톤으로 그는 이 신을 숭배했고, 신을 태양의 모습으로 그리게 했다. 그것은 원반 형태로 끝에 손이 달린 광선들을 발산했다. 그는 이 신의 이름을 본떠 자신의 이름을 아크나톤이라 불렀고, 그의 왕궁을 다른 신들을 믿는 사제들의 손이 미치지 않는 지역으로 옮겼다.
그가 화가들에게 그리게 했던 그림들은 그 시대의 이집트인들을 놀라게 했을 것이다. 그 그림들에서는 초기 파라오들의 그림에서 발견되는 엄숙하고 딱딱한 위엄은 하나도 볼 수 없으나, 그가 태양의 신 아톤의 축복을 받으며 아내 네페르티티와 함께 그들의 자녀를 사랑스럽게 껴안고 있는 인간적인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아크나톤의 후계자는 투탕카멘인데 많은 보물이 들어 있는 그의 무덤이 1922년에 발견되어, 아톤 종교의 현대적 양식을 띠고 있는 일부 작품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제18왕조 시대의 왕의 이러한 개혁을 쉽게 할 수 있었던 것은 그 당시 이집트 미술가들의 작품보다 훨씬 덜 엄격하고 자유로운 외국의 작품들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다. 외국 섬나라인 크레타에는 천부적인 재능을 가진 미술가들이 빠른 운동감을 표현하는 데 도취되어 있었다. 이런 작품들이 당시 신성한 규범에 얽매이지 않아도 되었던 이집트 장인들에게 영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집트 미술의 해방이 계속되지는 못했는데 이미 투탕카멘의 통치 시대에 옛 종교가 부활하였고 외부 세계로 열린 문은 다시 닫혀 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시대 이전에 천 년이나 계속되었던 이집트 양식이 그 후로도 다시 천 년 이상 계속되었기 때문에 이집트인들은 그 양식이 영원히 지속될 것이라 믿었다. 새로운 시도가 행해졌지만, 이집트 미술의 업적에는 본질적으로 새롭게 보태어진 것이 없었다.
메소포타미아의 미술
그리스 말로 유프라테스와 티그리스강의 계곡을 의미하는 '메소포타미아'의 미술은 이집트 미술보다 비교적 덜 알려져 있는데, 이는 어느 정도 우연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 계곡에는 채석장이 없어, 대부분의 건물은 구운 벽돌로 만들어졌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풍화작용에 의해 먼지로 변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이 현재까지 전해지는 이 지역 미술 작품의 수가 적은 유일한 이유는 아닐 것이다. 아마 가장 큰 이유는 이 민족들이 이집트인처럼 인간의 영혼이 계속 살아가기 위해 육체와 그 형상이 보존되어야 한다는 종교적인 신앙이 없었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의 미술가들은 무덤의 벽면을 장식하지는 않아도 되었으나 그들 또한 이집트인들과는 다른 방법으로 통치자가 내세에서도 계속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줄 형상을 그려야 하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아주 일찍부터 메소포타미아의 왕들은 전쟁에 패배한 종족들과 빼앗은 전리품들에 대해 기록하는 전승비를 세우도록 하는 관례가 있었다. 형상이 가지고 있는 힘에 대한 고대인들의 신앙은 형상을 만들도록 명령한 사람들에게 그때까지도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고, 그들의 왕이 패배한 적을 짓밟고 있는 한, 적들이 다시는 일어날 수 없을 것이라 믿었을 것이다. 뒤에 가서 이러한 기념비들은 왕의 전쟁에 대한 완전한 그림 연대기로 발전하게 되었는데, 그것들을 보고 있으면 마치 그 당시의 뉴스를 보듯, 모든 것이 사실처럼 실감 나게 보인다. 다만 그들이 가지고 있었던, 형상에 대한 믿음으로 인해 아군은 죽거나 다친 사람이 없지만, 적들은 처참하게 패배한 모습으로 묘사된 것을 고려해야겠지만 말이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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