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1년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하고 교회를 국가의 지주로 삼게 되자 교회는 엄청난 문제에 직면했다. 기독교를 박해하던 시대에는 공공 예배 장소를 건립할 필요도 없었고 또 그럴 수도 없었다. 그 당시에 존재했던 교회나 회당들은 규모가 작고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일단 교회가 국가의 최대 세력이 되자 미술과의 모든 관계는 재검토되어야 했다.
예배 장소를 고대의 신전을 모델로 할 수는 없었다. 필요한 기능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이었다. 교회는 사제가 높은 제단 위에서 미사를 올리거나 설교를 할 때 모여드는 회중을 수용할 공간이 있어야 했다. 그리하여 교회는 이교도의 신전이 아닌, 고전기에 바실리카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커다란 집회소의 형태를 본떠 만들어졌다. 바실리카란 대충 큰 회당이라는 뜻인데,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어머니는 교회로 사용하기 위해 이러한 바실리카를 세우게 했다. 대부분의 바실리카에서 천장이 높은 신랑은 흔히 목재로 지붕을 했으며 들보는 노출되어 있었다. 측랑은 지붕을 평평하게 만들 때가 많았는데 신랑과 측랑을 구분하는 기둥들은 대개 화려하게 장식되었다. 초기의 바실리카 중에 변하지 않고 본래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것은 하나도 없으나, 우리는 이 건물이 일반적으로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는지 짐작해볼 수는 있다.
초기 기독교 미술과 회화
바실리카를 어떻게 장식하는가 하는 것은 대단히 어렵고 신중해야 할 문제였다. 형상을 종교에 사용한다는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격렬한 논쟁을 불러왔기 때문이다. 거의 모든 초기 기독교 신자들은 교회당에는 어떠한 조상도 있어서는 안 된다는 점에 의견을 같이했다. 조상은 성경이 매도하고 있는 우상이나 이교도들의 신상과 너무나 비슷했기 때문이다. 제단 위에 신이나 성인들의 조상을 안치한다는 것은 생각할 수도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대부분의 기독교인이 커다란 실물과 같은 조각상은 반대했지만, 회화에 대해서는 생각이 달랐다. 어떤 사람들은 그림이 하느님의 가르침을 회중에게 상기 시켜 주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때문에 필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했다. 6세기 말의 대교황 그레고리우스는 이 방침을 택했다. 그는 회화적 표현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많은 신도가 글을 읽거나 쓸 수 없기 때문에 그들을 교화시키려면 이러한 회화가 그림책에 있는 그림처럼 유용하다고 말했다.
이처럼 막강한 권위를 가진 사람이 회화를 옹호한 것은 미술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사람들은 교회에서 형상의 사용이 비난받을 때면 언제나 교황의 말을 인용하고는 했다. 그렇다 해도 용인된 미술의 유형은 상당히 제한되어 있었다. 이야기는 될 수 있는 한 명확하고 단순해야 하며, 이 주되고 성스러운 목적에서 주의를 다른 곳으로 돌리게 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배제해야 했다.
이런 그림은 처음 볼 때, 상당히 딱딱하고 엄격하게 느껴진다. 여기에는 그리스 미술의 자랑이었고 로마 시대에까지 지속하였던 운동감과 표정의 완숙한 표현 같은 것이 전혀 없다. 인물들이 엄격하게 정면을 보도록 배치한 방법은 어린아이의 그림 같은 느낌도 든다. 그림이 우리에게 다소 원시적으로 보인다면 그것은 화가가 단순함을 원했기 때문일 것이다. 교회가 명확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모든 사물을 표현하는 데 명확성을 중요시했던 이집트의 관념이 되살아났다. 그러나 화가들이 이 새로운 시도에 사용한 형식은 원시 미술의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그리스의 회화에서 한층 발전된 것이었다. 이리하여 중세의 기독교 미술은 원시적인 방법과 세련된 방법이 기묘하게 혼합됐다.
교회와 미술의 목적
교회에 있어서 미술의 정당한 목적이 무엇인가란 문제는 유럽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 왜냐하면 비잔티움에 수도를 둔 동로마 제국, 즉 로마 제국에서 그리스어를 사용하는 동부 지역이 라틴계 교황의 지배를 거부한 중요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여기에 있었기 때문이다. 동로마 교회 중의 일파는 종교적인 성격을 갖는 모든 형상에 대해 반대했다. 이들이 득세한 뒤로 동로마 교회에서는 모든 종교적인 미술이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들을 반대하는 사람들도 그레고리우스 교황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에게는 그러한 형상이 유익하기만 한 게 아니라 신성한 것이기도 했다. 이러한 견해를 정당화하는 데 사용했던 논거는 그들의 반대파가 사용했던 것만큼이나 미묘했다. 우리가 이런 논리를 어떻게 생각하든지 간에 미술사에서 그 중요성은 엄청난 것이었다. 백 년 동안 억압을 받던 이 일파가 득세하게 되자 교회 내에서의 회화는 실용적 목적을 넘어 성스러움을 부여받았다. 그렇기 때문에 동로마 교회는 미술가들이 그들의 상상에 따라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는 것을 더는 허용할 수 없었다.
이리하여 비잔틴 사람들은 전통의 준수라는 측면에서는 이집트인들처럼 엄격했다. 이 엄격함은 두 가지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다. 비잔틴 교회는 성상을 그린 화가에게 고대의 모델을 엄격하게 지키라고 요구함으로써 옷 주름이나 얼굴 및 몸짓의 묘사에 사용된 유형들에 관한 그리스 미술의 관념과 업적을 그대로 보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로 인해 비잔틴 미술은 그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그 이후의 서유럽 미술보다도 더 자연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반면 전통을 강조하고, 그리스도나 성모를 표현하는 데 있어 어떤 허용된 범위를 지켜야 한다는 것 때문에 비잔틴 미술가들이 그들의 개인적인 자질을 개발하기는 어려웠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보수성은 서서히 발전했기 때문에 미술가들이 아무런 자유도 가지지 못했다고 상상해서는 안 된다. 중세의 발칸 반도나 이탈리아에서 이 그리스 미술가들이 제작해놓은 모자이크 작품들을 보면 이 동방 제국이 고대 오리엔트 미술의 장려함과 엄숙함을 어느 정도 되살리는 데 성공했으며, 그리스도와 그의 권능을 찬양하는 데 이를 적절하게 이용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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