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이제까지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시대까지, 나아가 일반인들에게 하느님의 가르침을 설교하는 데 형상이 유용하다는 그레고리우스 대교황의 칙령이 받아들여진 6세기까지의 서양 미술의 역사를 살펴보았다. 이 초기 기독교 시대를 뒤이은 시대, 즉 로마 제국의 붕괴 이후의 시대는 일반적으로 암흑 시대라는 불명예스러운 이름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기를 명확하게 한계지을 수는 없으나 논의 상 대략 500년경부터 1000년경까지 계속되었다고 말할 수 있다. 500년이라는 긴 기간동안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어떤 분명하고 통일적인 양식이 생겨나지 않았으며, 오히려 수많은 서로 다른 양식들이 갈등을 일으켜 혼돈의 상태에 빠져있었다. 이 시기가 끝날 무렵에야 그러한 갈등이 겨우 마무리되었다. 암흑시대의 역사를 조금이나마 아는 사람들에게는 하등 놀라울 것이 없는 이야기다.
암흑 시대 속 미술을 부흥시키려는 노력
이 500년 동안에도, 특히 수도원과 수녀원에는 계속해서 학문과 예술을 사랑하는 남녀들이 있었고 또 이들은 도서관과 보물실에 보관된 고대 세계의 작품들에 대해 찬탄했다. 이 학식 있고 교육받은 수도사나 성직자들은 왕국의 궁정에서 권력과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지위에 올라 그들이 그렇게 경탄했던 고대의 미술을 부활시키기 위해 여러 번 시도했지만 그들의 노력은 번번이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 이유는 그들과 예술관이 전혀 다른 북쪽의 무장한 침략자들의 전쟁과 침략 때문이었다. 그 침략자들은 그리스와 로마의 업적을 귀중한 것으로 생각한 사람들에게 야만인으로 여겨졌으나, 그것은 그들이 아름다움에 대해 전혀 느낄 줄 모른다거나 그들 나름의 고유한 미술을 하고 있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그들 중에는 정교한 금속 세공을 하는 장인이나 뉴질랜드의 마오리족의 장인들에 견줄 만큼 탁월한 목공예가도 있었다. 그들은 용들이 몸을 꼬고 있거나 새들이 신비롭게 얽혀 있는 것 같은 복잡한 문양을 좋아했다.
켈트족의 아일랜드와 색슨족의 잉글랜드의 수도사와 선교사들은 이러한 북방 민족 장인들의 예술을 기독교 미술에 응용하려 했다. 그들은 그 지방의 장인들이 사용했던 목조 건물을 모방하여 교회와 첨탑들을 돌로 건축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이룩한 가장 성공적이며 놀라운 업적은 7, 8세기에 만들어진 필사본들이었다. 비록 복음서 속, 저자들과 성인들의 형상은 원시인들의 우상처럼 딱딱하고 괴상해 보이긴 하나, 이 그림들을 단지 조잡하게만 보는 것은 잘못이다. 이 미술가들은 그들의 전통으로부터 훈련받은 눈과 손으로 필사본 위에 아름다운 문양을 그릴 수 있었기에 서유럽 미술에 새로운 요소를 가미할 수 있었다. 두 가지 전통, 즉 고전적인 전통과 토착 미술가들의 취향이 서로 충돌하여 이제껏 본 적 없던 새로운 미술이 서유럽에서 자랄 수 있었다.
그렇다고 그 이전의 고전 미술의 업적에 대한 지식이 완전히 잊힌 것은 아니었다. 로마 제국 황제의 계승자임을 자처했던 샤를마뉴 대제의 궁정에는 로마 장인들의 전통이 되살아났다. 샤를마뉴 대제가 800년경에 아헨에 있는 그의 궁정에 세운 대성당은 약 300년 전 라벤나에 세워진 유명한 교회의 충실한 복사판이었다.
미술가는 '독창적'이어야 한다는 관념은 근대적이며, 과거 대부분의 민족은 가지고 있지 않은 관념이었다. 서유럽의 중세 미술가들은 교회를 짓고, 성찬배를 디자인하고, 성경 이야기를 표현하는 데 있어 과거의 전례들로 훌륭히 그 목적을 이룰 수 있으니, 구태여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음악에 대한 우리의 접근 방법을 생각하면 이런 태도를 가장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음악가에게 결혼식에서 연주해달라고 부탁할 때, 우리는 그가 그 결혼식을 위해서 새로운 것을 작곡해 주리라고 기대하지 않는 것처럼, 중세의 미술 애호가가 미술가에게 성경 속 그림을 부탁했을 때 새로운 창안을 기대하지 않는 것과 같은 것이다.
느낀 것을 그림에 담은 중세 미술가
우리는 중세 화가가 그린 그림에서 고대 오리엔트 미술이나 고전 미술이 하지 못했던 것을 할 수 있게 만들어준 새로운 중세 양식의 출현을 볼 수 있다. 이집트인들은 대체로 그들이 존재한다고 '알았던' 것을 그렸고, 그리스인들은 그들이 '본' 것을 그렸지만, 중세의 미술가들은 그들의 '느낀' 것을 그림에 표현했다. 이러한 그들의 목적을 염두에 두지 않으면 중세의 미술 작품을 올바로 평가할 수 없다. 이들은 자연을 그럴듯하게 닮게 그리거나 아름다운 것을 만들어내려 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은 신앙의 형제들에게 성경의 내용과 가르침을 전달하고자 했고, 이런 점에서 그들은 그 이전이나 이후의 미술가들보다 더 성공적이었다. 이러한 명확한 표현은 필사본의 그림에서만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조각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시기의 모든 미술이 전적으로 종교의 이념에만 봉사하기 위해 존재한 것은 아니다. 중세에는 교회만 지어진 것이 아니라 성도 세워졌고, 성의 주인인 봉건 영주들과 귀족들 역시 종종 미술가들을 고용했다. 우리가 중세 초기의 미술을 논의할 때 이러한 비종교적인 작품들을 잊어버리고는 하는 건 성은 파괴당할 때가 많았던 반면 교회는 보존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종교적인 미술은 유행에 따라 제거되거나 파괴되었던 단순한 개인 저택의 장식물보다는 존중되었고 보다 주의 깊게 다뤄졌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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