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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18C 말~19C 초 프랑스 혁명과 미술 전통의 단절

by 행운지킴이 2022. 5. 18.

르네상스 시대에 화가나 조각가가 된다는 것은 보통의 직업과는 다른 일종의 천직으로 별도로 취급됐다. 또한 종교 개혁으로 교회 성상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어나 유럽 전역에서 그림과 조각들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어, 미술가들이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선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불러오지는 않았다. 미술은 그 이후에도 여전히 유한계급의 생활 속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고,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그런 것으로 여겨졌다. 유행의 변화 속에서도 대체로 회화와 조각의 목적은 전과 다름없었으며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이러한 미술의 목적이란 미술을 원하고 즐기려는 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물론 유파들 간의 격렬한 논쟁은 존재했으나 그럼에도 논쟁자들 사이에서는 합의된 것들이 있었다. 미술가란 자연을 연구해야 하고 나체화로부터 그림 공부를 시작해야 하며, 고대의 고전적인 작품들이 절대적인 최고의 미를 지니고 있다는 것이었다.

 

 

프랑스 혁명과 미술

 

18세기 말에 이르자 이러한 공통된 합의는 점차 무너지기 시작했다.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이 수백 년간 당연하게 여겨지던 수많은 가설에 마침표를 찍었을 때, 우린 근대에 진입했다. 프랑스 혁명은 이성의 시대에 근간을 두고 있었고 미술에 대한 관념 역시 변화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양식에 대한 미술가들의 태도가 변했다. 전에는 한 시대의 양식이란 그저 일이 행해지는 방식이었고, 사람들은 그것이 목적했던 효과를 얻는 데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 생각했기에 채택했던 것이었다. 이성의 시대가 되자 이 양식에 대해 의식하는 사람들이 생겼다. 왜 그 양식이어야만 하느냐는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나타난 것이다. 이러한 일이 18세기 영국에서 발생했다.

 

초대 영국 총리의 아들인 호레이스 월폴은 양식과 취향의 척도에 관한 화제로 시간을 보낸 영국의 부유하고 한가한 신사 중 가장 독특한 인물로 손꼽힌다. 그는 자신의 시골 별장을 남들처럼 정통 팔라디오 양식으로 짓는 것을 거부하고, 낭만적인 고성의 느낌이 드는 고딕 양식으로 지었다. 이것은 확실히 개인의 고유한 취향을 반영한 첫 번째 징후였다.

 

런던-트위크넘의-스트로베리-힐
런던 트위크넘의 스트로베리 힐 - 호레이스 월풀, 리처드 벤틀리와 존 츄트

 

하지만 이것은 시작이었다. 건축가 윌리엄 챔버스는 중국의 건축과 정원 양식을 연구하여 런던의 큐 왕립 식물원에 중국식 탑을 건축했다. 여전히 대다수 건축가는 르네상스 건축을 고전 양식으로 여기고 있었지만, 그들조차 올바른 양식에 대한 고민을 시작했다. 그 결과 이어져 온 관례와 전통 중 많은 것들이 고대 그리스 건축에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열정적인 여행가들에 의해 재발견되고 발굴된 신전들은 고전 건축의 원칙과는 동떨어져 있었고, 이제 건축가들은 올바른 양식을 찾아야만 했다.

 

그리스 복고

 

그리스 복고가 일어났다. 그리스 복고는 섭정 시대에 절정을 이뤘고, 이러한 그리스 복고의 형태를 가장 잘 연구 할 수 있는 곳은 당시 호황을 누렸던 온천 마을이었다. 그리스 양식의 엄격하고 단순한 규칙들을 적용한다는 건축 개념은 그 힘과 영향력을 전 세계로 넓히고 있던 이성의 옹호자들의 마음에 들었다. 미국과 프랑스에서 신고전주의 양식과 그리스 복고 양식으로 건물이 설계되었다. 이것은 결코 놀랄만한 일이 아니었다. 나폴레옹이 유럽에서 패권을 잡게 되자,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은 제정 양식이 되었고, 유럽 대륙에서도 낭만주의자들의 호응을 얻은 고딕 양식이 부활하여 그리스 복고 양식과 함께 공존했다.

 

 

아카데미의 과목이 된 미술

 

건축과는 달리 그림과 조각에서는 전통의 사슬이 단절되었다는 사실이 즉각적으로 느껴지지 않았을지라도, 사실 그 의미는 더 큰 것이었다. 문제의 뿌리를 살펴보려면 18세기 중엽으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그 위험은 이제 그림 그리는 일이 장인에서 도제로 지식이 전승되는 직업이 아니라 아카데미에서 가르쳐야 하는 하나의 과목이 되었다는 것이었다. 16세기 이탈리아의 미술가들은 자신들이 이룬 위대한 업적이 학자들과 진배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 그들이 모이는 장소를 처음으로 아카데미라고 칭했다. 이러한 아카데미가 학생들에게 미술을 가르치는 기능을 맡게 된 것은 18세기에 들어서였다. 18세기의 아카데미는 미술에 관심이 있음을 과시하려는 왕실의 후원을 받았지만, 미술이 번창하기 위해서는 당대 미술가들의 작품을 기꺼이 사려고 하는 구매자들이 많아야 했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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