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회의 시작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아카데미에서 옛 거장들의 위대함을 강조하면 할수록 후원자들이 당대의 생존해 있는 화가들에게 그림을 의뢰하기보다 거장의 작품을 사게 했다. 아카데미는 대책을 세워야 했고 회원들의 작품을 매년 전시하기로 했다. 첫 시작은 파리에서, 그 후엔 런던이 그 장소가 될 예정이었다. 화가와 조각가들이 구매자를 찾기 위해 관심을 끌고, 작품을 제작해 전시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일이기 때문에, 그 당시 전시회를 연다는 개념을 얼마나 획기적인 일이었는지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이런 연례 전시회들은 상류 사교계의 관심을 끄는 사회적 행사였고, 미술가들의 명성을 좌지우지할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미술가들은 성공적인 전시회를 위한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화가들은 대중의 관심을 끌 만한 요소들에 의지하고 싶은 유혹에 시달렸고, 대중의 취향에 부합하는 재능을 가진 이들과 소외당한 이들 사이의 의견 충돌이 미술이 가지고 있던 공통의 기반을 뒤흔들기 시작했다.
이런 위기는 미술가들이 도처에서 새로운 종류의 주제를 찾아내게 했다. 미술관과 박물관에 가 보면 똑같은 주제를 다루고 있는 그림들이 정말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대다수는 성경에서 따온 종교적 주제나 성자의 전설을 묘사하고 있지만, 세속적인 성격의 그림들마저 대개는 고대 그리스 신화나 로마의 영웅 설화 등 몇 가지 선택된 주제에 국한되어 있다. 하지만 이 모든 것들은 프랑스 대혁명을 기점으로 매우 급속히 변했다. 미술가들은 셰익스피어 작품의 한 장면에서부터 시사적 사건에 이르기까지 상상력과 흥미를 부추기는 모든 것이 작품의 주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고, 전통적인 주제를 무시한다는 점은 성공적인 화가와 외로운 반역자들의 유일한 공통점이기도 했다.
존 싱글톤 코플리
유럽 미술이 기존의 전통에서 이렇게 이탈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영국에서 활약했던 미국의 화가들의 큰 역할을 했다. 이들은 구세계에서 신성시되어온 관습에 구속감을 느끼고, 새로운 실험을 시도할 만반의 준비가 되어있었기에 어쩌면 그들의 역할은 필연적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부류의 전형적인 미국인 화가였던 존 싱글톤 코플리가 그린 대표작 중 하나는 1785년 처음 일반에게 공개되며 큰 물의를 일으켰다.
코플리는 찰스 1세가 영국 하원에, 탄핵당한 의원 다섯 명의 체포를 요구했을 때, 하원 의장이 왕의 권위에 도전하여 요구를 거절했던 사건을 그리도록 제안받았는데, 비교적 최근의 역사 중 한 일화를 대규모 그림의 주제로 삼는 것은 그때까지 한 번도 없던 일이었다. 더불어 그가 이 제안을 위해 선택한 방법도 전례가 없었다.
코플리는 목격자의 눈에 비친 것 같이, 적확하게 장면을 재구성하고 싶었다. 그는 역사적 사실들을 수집하는 데 최선을 다했다. 영화나 연극의 제작자가 시대적인 장면을 재구성하기 위해 자료를 모으는 듯이. 코플리는 국왕과 국민대표 사이에 일어났던 극적인 대결에 대한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싶었던 것이다. 불과 이 년 전, 조지 3세가 식민지 개척자들에게 굴복하여 미국과의 평화협정에 조인했고, 코플리에게 그림을 의뢰한 사람이었던 버크는 이 협정에 반대했던 사람이었다. 그림에 담긴 의미는 명확했다. 그리고 사 년도 채 되지 않아, 이 그림 속 장면이 프랑스에서 재현되었다. 주동자는 미라보였고, 국민대표를 몰아내려는 국왕을 거부하며, 1789년 프랑스 대혁명의 막이 올랐다.
프랑스 대혁명과 신고전주의
프랑스 대혁명은 코플리가 영국의 역사 속에서 주제를 구한 것과 같은 관심을 불러일으켰고 영웅적 주제를 다룬 그림들을 출현케 했다. 프랑스의 혁명가들은 자신들을 새로 태어난 그리스와 로마 시민으로 자처하기 좋아했고, 그들의 그림은 로마풍의 장려함이라고 불리는 취향이 녹아있다. 자크 루이 다비드는 이러한 신고전주의 양식의 지도자였다. 혁명 정부가 내세우는 공식 화가였던 그는, 선전 행사의 무대와 의상을 꾸몄다. 그리스와 로마 역사의 여러 일화와 마찬가지로, 그들은 지금은 영웅시대며, 당대의 사건들이 화가의 주목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다고 믿었다. 프랑스 대혁명의 지도자 중 한 사람이었던 마라가 목욕탕에서 피살당했을 때, 다비드가 그를 죽은 순교자의 모습으로 그렸던 건 바로 그 때문이었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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