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세기에 이르러 일부 미술가들은 석상에 생명감을 불어넣는 시도에 한층 깊은 발전을 보였다. 1260년경 독일의 나움부르크 대성당 설립자들의 조각상 제작을 위임받은 조각가는 그 당시 실제 기사들의 모습을 사실감 있게 구현했다. 그가 실물을 대상으로 이 작품을 제작했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 설립자들은 이미 오래전에 죽었기 때문이다.
13세기 북유럽 조각가들의 주된 업무는 성당을 위해 작품을 제작하는 것이었지만 당시 북부 화가들이 가장 빈번하게 맡았던 일은 필사본에 삽화를 그리는 일이었다. 그러나 이 삽화들은 엄숙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삽화와는 상당히 달랐다. 강렬한 감정의 표현과 인물들을 규칙적으로 배열하는 것이 인물들을 사실적으로 그리거나 실제적인 정경묘사를 하는 것보다 화가에게 중요했다. 보는 이에게 외부적인 암시 없이도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충분히 전달할 수 있었다.
실물을 보고 그림을 그린 미술가들
예술가들이 그들에게 흥미가 있는 것을 그리기 위해 표본이 되는 서적을 종종 참조하지 않게 된 것은 13세기에 들어서였다. 그것의 의미를 실물을 스케치하는 게 당연한 지금의 우리가 상상하기란 쉽지 않다. 중세 미술가들의 훈련이나 양성 과정은 지금과는 매우 달랐다. 중세 미술가는 그 시대 대가의 수습생으로 시작해, 처음에는 스승의 지시를 따랐고, 그림 속에서 비교적 덜 중요한 부분을 그려 넣으며 스승을 도왔다. 옛 서적들에 실린 장면을 모사하거나 재배치하면서 마침내는 그가 모르는 유형의 장면도 그릴 수 있는 충분한 능력을 습득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평생 실물을 보고 그릴 필요성을 느낄 일은 없었을 것이다.
중세에는 우리가 말하는 것과 같은 의미의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미술가가 할 수 있는 것은 인습적인 인물상을 하나 그리고 직함을 나타내는 표상 등을 그려 넣은 후, 모두가 알아볼 수 있도록 초상 아래쪽에 이름을 써넣었다. 13세기 미술가들에게 실물을 그린다는 건 아주 놀라운 일로 여겨졌다. 그러나 간혹 그들이 의존할 수 있는 전통적인 본보기가 없을 때는 직접 실물을 보고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대성당들의 시대인 13세기에 프랑스는 유럽에서 가장 부유하고 중요한 국가였다. 파리 대학교는 서양의 지적 중심지였지만 도시 국가로 분열되었던 이탈리아에서는 독일과 영국에서 열광적으로 모방하였던 위대한 프랑스 대성당 건축가들의 구상이나 방법이 처음에는 별다른 호응을 얻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미술
한 이탈리아 조각가가 자연을 보다 실감 나게 표현하기 위하여 프랑스 거장들의 작품을 모방하고 고전 건축의 표현 방법을 연구하기 시작한 것은 13세기 후반쯤이었다. 대항구 도시이자 무역 도시인 피사에서 작업한 니콜라 피사노였다. 그는 예리한 관찰력을 가지고 고전기와 초기 기독교 시대의 조각에 대해 깊이 연구했다. 니콜라 피사노는 그보다 한 세대 전에 활동했던 스트라스부르의 거장이나 그와 동년배였던 나움부르크의 대가와 마찬가지로 의상 아래에 있는 신체의 형태를 드러내고 인물들을 위엄있고 실감 나게 하는 고대의 방법을 터득했다.
이탈리아 화가들은 이탈리아 조각가들보다 더 늦게 고딕 예술의 대가들의 새로운 화풍에 관심을 보였다. 베네치아와 같은 이탈리아 도시들은 비잔틴 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장인들도 파리보다는 콘스탄티노플에서 영감과 지도를 받았다. 13세기에도 이탈리아의 교회들은 여전히 '그리스풍'의 장중한 모자이크로 장식되었다. 변화는 오랫동안 지연되었으나 13세기 말이 다가오자 이런 비잔틴 전통의 확고한 바탕이 이탈리아 미술가가 북유럽의 대성당 조각가들을 따라잡고, 회화에서도 일대 혁명이 가능하게 했다.
조각가는 단축법이나 명암을 통해 입체감을 나타냄으로써 깊이의 환영을 만들어낼 걱정을 할 필요가 없었다. 조각상은 실제의 공간과 빛 속에 서 있었기 때문에, 실물과 거의 같은 단계에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화가들의 작업은 그보다 어려웠다. 궁극적으로 이탈리아인들에게 조각과 회화를 분리하는 장벽을 뛰어넘게 만든 것은 비잔틴 미술이었다. 왜냐하면 그 엄격성에도 불구하고 비잔틴 미술은 서유럽 암흑시대의 필사본보다 더 오래 살아남았고, 헬레니즘 화가들의 발견을 더 많이 보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을 바탕으로 고딕 조각과 같은 조각상들을 회화에 대입한 천재가 등장했다. 피렌체의 화가 조토 디 본도네였다.
미술사 책에서는 대개 조토와 더불어 새로운 장을 시작하곤 한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이 위대한 화가의 출현으로 완전히 새로운 미술의 기원이 시작되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조토의 방법들이 비잔틴 거장들에게서 많은 영향을 받았으며, 그의 목적과 이념의 북유럽 대성당의 위대한 조각가들에게 힘입은 바가 크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그의 위대함을 훼손하지는 않는다. 조토의 가장 유명한 작품들은 벽화, 즉 프레스코들이다. 조토는 평면에서 깊이감을 느끼게 하는 기술을 재발견했고, 그것은 그로 하여금 회화의 개념 전체를 변경하게 했다. 그는 그림으로 기록하는 수법이 아닌 성경의 이야기가 바로 우리 눈앞에서 전개되는 것과 같은 환영을 창조해냈다.
조토의 명성은 세상에 널리 퍼져서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자랑으로 여겼다. 사람들은 그의 생애에 흥미를 느꼈고 그의 기지와 재주에 관해 일화를 이야기했다. 이것 역시 새로운 현상으로 이전에는 그런 일이 일어난 적이 없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미술가들의 이름을 후세에까지 알려지도록 보존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지 않았다. 당시의 사람들은 미술가들을 훌륭한 물건, 즉 가구나 옷 등을 만든 사람과 별반 다르지 않게 여겼다. 이런 점에서도 피렌체의 화가 조토는 미술 역사상 완전히 새로운 장을 개척했다. 그의 시대 이후로, 미술사란 위대한 미술가들의 역사가 된 것이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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