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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14C 유럽 미술과 국제적 양식

by 행운지킴이 2022. 4. 18.

13세기는 대성당들의 시대로 이 대성당에서 거의 모든 분야의 미술이 각자의 역할을 해내고 있었다. 이러한 거대한 건축 사업을 14세기 이후로도 계속되었으나 더는 미술의 구심점이 되지는 못했다. 고딕 양식이 처음 발전했던 12세기 중반의 유럽은 아직 인구가 적은 농경지였으나 약 150년 뒤 이 도시들은 번화한 중심지로 성장했고 시민들은 점차 교회와 봉건 영주들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시작했다. 귀족들도 요새와 같은 장원에서 격리되어 살기보단 안락과 사치를 즐길 수 있는 도시로 이주해서 그들의 부를 과시했다. 14세기는 장대한 것보다는 세련된 것을 추구했던 시기였다.

 

정교하며 장식적인 미술

 

이 시기의 건축을 보면 이 점이 분명하게 드러난다. 영국에서는 소위 '초기 영국 양식'이라고 알려진 초기 대성당들의 순수한 고딕 양식과 이런 형식이 발전하여 생긴 소위 '장식적 양식'이라고 알려진 것으로 구분됐는데, 그 명칭 자체가 취향의 변화를 말해준다. 14세기 고딕 양식 건축가들은 초기 성당의 분명하고 장엄한 외관에 더해 장식과 복잡한 트레이서리를 통해 그들의 솜씨를 과시하고자 했다. 엑서터 대성당의 서쪽 창문이 이 양식의 전형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엑서터-대성당의-서쪽-정면
엑서터 대성당의 서쪽 정면

 

14세기의 가장 특징적인 조각 작품들은 그 시대의 교회를 위해 만들어졌던 수많은 석조물이 아니라 당시 장인들의 뛰어난 솜씨를 보여주는 귀금속이나 상아로 만든 소품들이었다. 이러한 작품들은 대성당의 조각품들처럼 엄숙한 초연함 속에서 진리를 보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로움을 불러일으키도록 만들어진 것이었다.

 

14세기 화가들의 우아하고 섬세한 세부 묘사에 대한 집착은 영국의 기도서와 같은 유명한 필사본에서 엿볼 수 있다. 우아한 설명과 충실한 관찰이라는 두 요소가 점차 하나로 융합되기 시작한 것은 14세기에 이르러서였다. 아마도 이탈리아 미술의 영향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풍조가 그렇게 빨리 이루어지지는 못했을 것이다.

 

이탈리아, 특히 피렌체에서는 조토의 미술의 회화의 모든 개념에 변화를 불러왔다. 고대 비잔틴 양식이 딱딱하고 구식으로 보였다. 조토의 개념은 알프스 이북의 여러 나라로 영향력을 넓혔고, 반면에 북쪽의 고딕 화가들은 남유럽의 거장들에게 영향을 미치기 시작했다. 이들 북유럽 미술가들의 취향과 양식이 가장 큰 영향을 준 곳은 피렌체의 적수였던 토스카나의 시에나였다. 시에나의 화가들은 피렌체의 조토처럼 혁명적인 방법으로 갑자기 초기 비잔틴 미술의 전통을 끊어버리지는 않았다. 조토와 같은 세대로 시에나의 거장인 두초는 고대 비잔틴 형식을 완전히 버리지 않고, 거기에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으려 노력한 결과 성공을 거두었다. 우리는 앞에서 중세 미술가들이 만족스러운 구도를 만들기 위해,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의 상징을 배열한 방법을 보았다. 그러나 그러한 효과는 사물의 실제 형상과 비례를 무시하고 공간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상황에서 가능했다. 하지만 시에나의 미술가들은 인물 모습을 패턴 속에 조화롭게 배치할 수 있었다.

 

중세에는 우리가 지금 사용하는 그런 의미의 초상화는 존재하지 않았고 당시의 미술가들은 판에 박힌 남자나 여자의 상을 그리고 그 밑에다 초상 인물의 이름을 써넣었다. 하지만 14세기 미술의 거장들은 자연을 주제로 실물과 유사한 사실적인 그림을 그렸고, 이 시기에 초상 미술이 발전했음을 알 수 있다.

 

국제적 양식의 미술

 

보헤미아 지방은 이탈리아와 프랑스로부터 영향력이 전파되는 중심지 중 하나가 되었다. 그 영향력은 보헤미아의 앤 공주와 결혼한 리처드 2세의 영국까지 미쳤다. 영국은 부르고뉴와 무역을 했고, 라틴 교회의 지배를 받는 유럽은 아직도 하나의 큰 단위를 이루고 있었다. 미술가들과 사상가들은 한 중심지에서 다른 중심지로 옮겨 다녔고, 다른 지방의 것이라는 이유로 새로운 업적이 배척당하지 않았다. 14세기 말에 이처럼 서로 주고받는 가운데서 생겨난 양식을 '국제적 양식'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국제적 양식의 미술가들은 관찰력과 아름답고 섬세한 사물에 대한 그들의 취향을 그들 주변 세계를 묘사하는 데 쏟아부었다.

 

미술가들의 관심은 가능한 한 가장 명료하고도 인상적으로 성경 이야기를 전달하는 가장 좋은 방식이 무엇인가 하는 것에서 자연의 일면을 가장 충실하게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것으로 점차 변해갔다. 우리는 이 두 가지 방법이 반드시 상충하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새롭게 얻은 자연에 관한 지식을 14세기, 그리고 그 이후의 거장들이 했던 것처럼 종교 미술에 적용하는 것은 확실히 가능했다. 그러나 미술가들의 임무가 변했다. 전에는 성경에 나오는 주요 인물들을 묘사하는 고대의 공식을 배우고 이러한 지식을 새로운 방식으로 활용하는 것만으로 충분했다. 하지만 이제 미술가의 작업에는 다른 기술이 포함됐다. 미술가는 자연을 스케치하고, 이것을 그림에 옮겨 담을 수 있어야 했다. 스케치북을 사용하기 시작했고 희귀하고 아름다운 동식물들의 스케치를 비축해두어야 했다. 미술가들의 작품을 감상하는 일반 사람들도 자연을 묘사한 화가의 기교나 그림 속에 뛰어난 세부 묘사가 얼마나 많이 들어있는가에 따라 미술가를 평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미술가들은 한 걸음 더 나아가기를 원했다. 그들은 자연의 관찰을 통한 세부 묘사의 기술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시각의 법칙을 개척하고 인체에 대한 충분한 지식을 얻어, 그것을 토대로 조각과 그림을 제작하려 했다. 미술가들의 관심이 이런 방향을 향하자 중세 미술은 사실상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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