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세기 후반, 바로크 양식은 델라 포르타가 설계한 예수회 교단의 교회에서 시작되었고, 그는 더욱 많은 다양성과 인상적인 효과를 살리기 위해 소위 고전적인 건축의 규칙을 무시했다. 예술은 일단 이러한 길에 들어서면 계속해서 그 길로 나아가게 된다. 다양하고 인상적인 효과가 중요한 것으로 간주함에 따라 그 이후의 미술가들은 계속에서 그 인상적인 효과를 만들어내기 위해 더 복잡한 장식과 아이디어를 고안해내야만 했다. 그렇게 17세기 전반의 이탈리아에서는 건물과 그 장식에 대해 새롭고 눈부신 구상들이 하나둘 축적되어 17세기 중엽, 바로크 양식은 완전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바로크 양식의 파격
유명한 건축가인 프란체스코 보로미니가 건립한 전형적인 바로크 양식의 교회당을 보면 그가 채용한 것은 사실 르네상스 형태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보로미니는 고전 건축에서 빌려온 기둥 양식으로 벽을 장식하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의 파격적인 설계는 모든 정통파 건축 교사들을 불쾌하게 만들 정도였으나 그의 시도는 건물 전체적으로 볼 때 조화로운 게 사실이었다. 바로크 양식의 소용돌이 장식과 곡선은 건물의 전반적인 설계와 장식적인 세부까지 지배하고 있는데 사실 이런 것들로 인해 바로크 양식의 건물들은 지나치게 장식적이고 과장되어 있다는 평을 들어왔다. 하지만 그런 비난을 이해하기 어려웠던 보로미니는 그의 교회가 흥겹고 화려하며 운동감이 가득한 건물이 되길 원했다.
교회의 내부로 들어가면 그가 중세 성당들보다 더 구체적인 방법, 보석과 황금, 스터코 등을 이용해 호화로운 천상의 영광을 재현했음을 알 수 있다. 북유럽 나라의 교회 내부에 익숙한 사람들의 눈에는 너무 세속적일 정도로 장식이 눈부시지만, 그 당시 가톨릭교회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교회의 외면적인 치장에 반대하는 신교에 대항하듯 로마 교회는 더 열렬히 미술가의 힘을 빌렸다. 이 결과 우상 숭배라는 말 많고 탈 많은 문제가 다시 바로크 양식의 발전에 간접적인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가톨릭교회는 글을 못 읽는 사람들에게 교리를 가르치는 역할, 즉 중세 초기 미술이 가지고 있던 단순한 임무 이상으로 미술이 종교에 공헌할 수 있음을 알게 됐다. 사람들을 개종시키기 위해, 많은 건축가, 화가, 조각가들이 교회를 이 목적에 걸맞은 거대한 장식물로 변형시키기 위해 소집되었다. 교회당 내부에서 중요한 것은 교회 전체가 주는 전반적인 효과지만, 교회의 내부를 로마 교회의 장려한 의식의 틀로 보지 않거나 장엄한 미사에 참석해보지 않는다면 이런 호화찬란한 교회의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잔 로렌초 베르니니
이러한 무대 장식 같은 현란한 미술은 잔 로렌초 베르니니라는 한 미술가에 의해 주로 발전되었다. 그는 최고의 초상화가 중 한 사람이었다. 베르니니의 걸작 가운데 하나인 젊은 여자의 흉상은 그 여인의 가장 특징적인 순간의 표정을 포착한 것으로 보인다. 그는 표정을 묘사하는 데 남다른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그러한 표정의 묘사를 이용해 그의 종교적인 체험에 시각적인 형태를 부여하는 데 성공했다.
베르니니는 로마에 있는 교회의 부속 예배실을 장식하기 위해 제단을 만들었는데, 스페인의 성 테레사에게 봉헌된 이 제단은 그녀가 본 신비스러운 환영을 형상화하고 있다. 북유럽에서 온 방문객이라면 처음 이 작품을 보고, 이 전체적인 구도가 무대 효과적이고 천사와 성녀가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표현됐다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바로크 미술가들이 종교 미술 작품을 제작하면서 열렬한 환희와 신비로운 황홀경의 느낌을 불러일으키기를 의도했다면 베르니니는 그 목적을 완벽히 달성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는 의도적으로 미술가들이 그때까지 기피했던 감정의 극점으로 보는 이를 이끌었다.
베르니니의 성 테레사와 같은 조각 작품을 판단할 때는 그것이 놓인 장소까지 고려해야만 올바로 판단할 수 있는 것처럼, 바로크 교회의 회화 장식도 마찬가지였다.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는 베르니니를 추종하는 화가로, 그가 그린 교회의 천장 장식을 보면, 보는 이로 하여금 천국의 영광을 곧바로 보고 있는 듯한 환상을 주기 위해 얼마나 무대 효과를 이용했는지 알 수 있다. 틀을 깨고 나온 그림은 우리를 교란하고 압도해서 무엇이 실제이고 환상인지 알 수 없게 만들지만 이런 그림은 이것이 놓여 있는 장소를 벗어나면 그 의미를 상실하고 만다. 그렇기에 하나의 효과를 달성하기 위해 모든 예술가가 협력했던 바로크 양식의 발전이 완성되자, 가톨릭 세계에서 회화와 조각이 각각 독립적인 예술로 발전하지 못하고 쇠퇴하고 만 것일지도 모른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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