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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17C 네덜란드 미술과 초상화의 발달

by 행운지킴이 2022. 5. 11.

유럽이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로 나뉘어 대립하게 되자 네덜란드와 같은 작은 나라의 미술에도 그 영향이 미쳤다. 오늘날 우리가 벨기에라고 부르는 네덜란드의 남부 지역은 그 당시 가톨릭으로 남아 있었으나 네덜란드의 북쪽 지방 사람들은 그들을 지배하는 스페인의 가톨릭 군주에게 대항해 반란을 일으켰다. 북쪽의 주민들은 대부분 신교를 믿었고 국경 너머 가톨릭을 믿는 나라와 취향이 아주 달랐다. 이들은 영국의 청교도들과 흡사한 태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경건하고 근면 절약하여 호사스러운 남쪽 지역의 허식을 싫어했다. 17세기, 바로크 양식이 유럽의 가톨릭 국가들을 휩쓸었을 때도 네덜란드의 시민들은 그 유행을 거부했으며 수수하고 절제된 양식을 선호했다.

 

신교의 승리는 건축보다 회화에서 더 두드러졌는데 중세 유럽 중 미술이 번창했던 영국과 독일에서도 이 미술의 위기는 매우 심각해서, 화가나 조각가라는 직업이 재능있는 젊은이들의 관심을 끌지 못했다. 더욱이 화가들은 종교적인 관점에서 아무런 이의가 없는 회화의 특정 영역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초상화의 발달

 

초상화 그리기는 신교 사회에서 계속될 수 있었던 회화의 영역 중에서도 제일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다. 성공한 많은 상인과 시장이나 시의원으로 선출된 명사들은 각자의 목적에 따라 초상화를 남기고 싶어 했다. 심지어 네덜란드 도시들의 지방 위원회 및 자치 단체의 임원들에게 회의실과 같은 장소에 그들의 집단 초상화를 자랑삼아 걸어놓는 관습이 그대로 남아 있기도 했다.

 

프란스 할스

 

프란스 할스는 자유로운 신생 네덜란드에서 최초로 출현한 거장이었으나 고객들의 취향과 유행에 따라 수입이 들쑥날쑥한 초상화를 그렸기에 생활 역시 불안정할 수밖에 없었다. 네덜란드의 시민들은 가장 부유한 주민들의 지휘 아래 차례로 군 복무를 해야 했는데, 이때 임무를 할당받은 각 부대들의 장교들을 위해 호사스러운 연회를 베푸는 것이 그가 정착한 하를렘시의 관습이었고, 이 행복한 순간을 거대한 그림으로 남겨 기념하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는 초창기에 이런 종류의 그림을 그려달라는 주문을 받았는데, 그의 빼어난 솜씨와 독창력이 그가 그린 그림 안에 잘 녹아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프란스-할스의-성-조지-시민-군단-장교들의-연회
성 조지 시민 군단 장교들의 연회 - 프란스 할스

 

할스는 의례적인 모임에 어떻게 생기를 불어넣어야 할지, 그 순간의 유쾌한 분위기를 어떻게 전달할 수 있는지를 알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12명의 인물 모두의 개성을 놓치지 않고 실감 나게 묘사하는 능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에게 얼마 안 되는 수입만을 안겨준 수많은 개인 초상화들을 보면 그의 능란한 솜씨를 더욱 잘 살펴볼 수 있는데, 할스 이전의 초상화들과 비교화면 그의 그림은 거의 스냅 사진처럼 보일 정도다. 약 한 세기 전에 그린 거장들의 초상화는 모두 생동감이 넘치고, 사실적이기는 하지만 화가들이 대상의 자세를 세심하게 배려하여 그들의 위엄과 혈통을 암시했다. 그러나 할스의 초상화들은 화가가 대상의 순간을 포착해 그의 화폭에 고정한 듯한 느낌을 준다. 물론 초상화의 주인공이 우연히 취한 듯한 순간적인 인상을 그림으로 그리는 것은 치밀하게 계산된 노력이 없이는 결코 이룰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초상화는 초기의 초상화들이 그랬던 것처럼 좌우 대칭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한쪽으로 치우쳐 불안정하지도 않다. 그는 바로크 시대의 다른 거장들처럼 규칙을 따르지 않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훌륭하게 균형감을 유지하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전문화의 시작

 

불행히도 신교를 믿는 네덜란드의 화가 중 초상화에 재능이 없는 사람들은 주문받아 그림을 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버려야 했다. 그들은 먼저 그림을 그려놓고 구매자를 찾아 나섰다. 오늘날 당연한 이 방식이 그 당시엔 파격적인 방식이었다. 어떤 면에서는 예술가들이 드디어 후원자의 간섭없이 자신의 작업을 할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자유의 대가는 절대 싸지 않았다. 그들은 이제 한 사람의 후원자가 아니라 작품을 구매하는 대중을 상대해야 했기 때문이다. 경쟁은 점점 치열해졌고, 이름이 나지 않은 군소 화가가 명성을 얻는 유일한 길은 남들이 시도하지 않는, 특수한 장르의 그림을 전문적으로 그리는 것이었다. 대중들은 어느 분야에서 누가 유명한 작가인지 알고 싶어 했으며 화가들은 자신이 명성를 얻은 장르의 작품만을 손쉽게 팔 수 있었다. 그런 이유로 화가들은 안전하게 자신이 성공을 거둔 장르의 그림을 계속해서 그리기 시작했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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