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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15C 초 이탈리아와 북유럽 미술의 발전

by 행운지킴이 2022. 4. 20.

도나텔로는 살아있을 당시에 굉장한 명성을 얻었는데, 백 년 전의 조토와 같이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로 불려 다니며 그 도시의 아름다움과 영광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세례 요한의 생애 중 한 장면인 살로메 공주가 헤롯 왕에게 춤을 춘 대가로 성 요한의 머리를 달라고 요구하여 그것을 받은 순간을 묘사한 청동 부조를 보고, 고딕 미술의 명확하고 우아한 이야기 방식에 익숙한 사람들은 도나텔로의 이야기 방식을 보고 틀림없이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인물들의 몸짓은 격렬하며 이야기의 끔찍함을 완화하려는 시도는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기에 그 당시의 사람들에게는 이 장면이 기분 나쁠 정도로 생생하게 보였을 것이 틀림없다.

 

'성인의 머리를 방 안으로 가져왔을 때의 정경을 어땠을까?'라는 자신의 질문에 그는 최선을 다해 그런 사건이 일어났음직 한 건물로 고전적인 궁전을 그리고, 로마 시대 유형의 인물을 선택해 배경에 인물들을 배치했다. 그 당시 도나텔로는 그의 친구 브루넬레스코와 마찬가지로 미술을 재생하는 데 도움을 얻기 위해, 로마의 유적들을 체계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미술의 부활을 너무나 갈망했기 때문에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자연, 과학과 고대의 유물에 눈을 돌리게 된 것이다. 과학과 고전 미술에 관한 전문적인 지식은 얼마 동안 르네상스 시대의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전유물로 남아 있었지만, 과거에 존재했던 어떤 것보다 더 자연에 충실한 새로운 미술을 창조하려는 정열적인 의지는 북유럽 미술가들에게도 영감을 주었다.

 

북유럽 미술에 꽃피운 사실성

 

피렌체에서 고딕 양식의 섬세함과 세련미에 싫증을 느끼고 보다 힘 있고 장중한 인물상을 창조하고자 했던 것처럼, 알프스 북쪽에서도 한 조각가가 보다 실감 나는 미술을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이 조각가는 클라우스 슬뤼터르로 그는 놀라운 사실감과 함께 흘러내리는 의상에 기품 있는 자태를 가진 인물상들을 창조했다. 그러나 북유럽에서 사실성의 정복을 최종적으로 완수한 사람은 조각가가 아니다. 화가 얀 반 에이크는 혁명적인 창의성을 보였다. 슬뤼터르와 마찬가지로 그는 부르고뉴 공국의 궁전과 관계를 맺고 있었지만 대부분 과거에는 네덜란드였지만 현재는 벨기에에 속해 있던 지방에서 일했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은 헨트시에 있는 거대한 제단화인데, 이 작품은 얀보다는 덜 알려진 그의 형 휘버트가 시작해, 1432년에 얀이 완성했다고 한다.

 

얀-반-에이크의-날개가-펼쳐진-헨트-제단화
날개가 펼쳐진 헨트 제단화 - 얀 반 에이크

 

많은 장면을 담고 있는 이 제단화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게 되어 있는데, 축젯날이면 펼쳐서 그 빛나는 색채를 드러냈고 주간에는 접어서 다소 칙칙한 외관을 보여주었다. 여기에는 조토가 아레나 예배당에 선과 악에 대한 형상들을 그려놓았던 것과 마찬가지로 세례자 요한과 복음서 저자 요한이 입상으로 그려져 있다. 하지만 반 에이크의 새롭고 놀라운 미술 개념을 확실히 드러내는 부분은 양 날개 부분의 안쪽에 그린 타락 이후의 아담과 이브의 모습이다. 그들은 손에 든 무화과 잎사귀가 무색하게 완전히 벌거벗은 모습이다. 이 점에서 반 에이크는 그리스와 로마의 미술 전통을 절대 완전히 버리지 않았던 이탈리아의 초기 르네상스 대가들과 진정으로 대비된다. 고대 미술가들은 인물을 이상화했으나 반 에이크는 절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반 에이크 형제는 랭부르 형제 같은 미술가들의 방법을 추구했고, 그것을 완벽한 경지로 이끌었다. 자연에 대한 관찰은 전 세대의 미술가보다 더 집요했고 세부 묘사에 관한 지식도 훨씬 정확했다. 이러한 작은 세부들을 세세히 살펴보고 얼마나 끈기 있게 자연을 관찰하고 모방했는가로 미술가의 위대함을 평가하는 것을 편협한 일인지도 모른다. 자연을 충실하게 모방하지 않았다고 해서 다른 작품들을 낮게 평가하는 것은 분명 잘못된 일이다. 하지만 우리가 북유럽의 미술이 발전해나간 방식을 이해하려면 반 에이크의 무한한 주의력과 인내력에 높은 점수를 주어야 할 것이다.

 

그와 같은 세대의 남유럽 미술가들이 자연을 그림에 과학적인 정확성을 가지고 묘사하려 했다면 반 에이크는 정반대의 방법을 사용했다. 그는 그림 전체가 가시적인 세계의 거울이 될 때까지 끈기를 가지고 세부를 촘촘히 묘사하면서 자연의 환영을 만들어냈다.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미술은 이런 점에서 오랜 기간 주요한 차이를 보여왔다. 북유럽 화가, 특히 네덜란드의 화가는 물건이나 꽃, 보석 또는 천의 아름다운 표면을 묘사하는 데 뛰어났고, 반면 이탈리아 화가는 대담한 윤곽선과 명확한 원근법을 바탕으로 인체의 아름다움을 확실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회화 기법의 개량과 유화의 시작

 

현실의 세세한 부분들을 비춰주는 거울을 창조하기 위해 반 에이크는 회화의 기법을 개량해야 했다. 그는 유화를 발명했다. 그가 발명한 유화는 원근법의 발견처럼 완전히 새로운 것은 아니었지만 안료를 화면에 칠하기 전에 준비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방식을 고안해냈다는 데 업적이 있다. 당시 미술가들은 자신이 사용할 안료를 직접 만들어야 했는데, 풀이나 광물질을 갈거나 빻은 가루를 용매를 첨가해 일종의 반죽과 같이 만들었다. 보통 용매로 달걀이 쓰였는데, 달걀의 단점은 너무 빨리 마른다는 것이었다. 색들이 서로 섞여들어 가는 부드러운 변화를 나타내고 싶었던 반 에이크는 달걀 대신 기름을 사용함으로써 보다 여유 있고, 정확하게 그림을 제작할 수 있었다. 

 

현실을 눈에 보이는 그대로 전달하고자 하는 이러한 시도를 위해 반 에이크는 고딕 양식의 쾌적한 형식과 유려한 곡선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당시 유럽 전역의 미술가들은 진실을 정열적으로 탐구하는 데 있어 미에 대한 구세대의 낡은 개념을 거부했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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