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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16C 초 레오나르도와 미켈란젤로의 미술

by 행운지킴이 2022. 4. 27.

레오나르도의 모나리자

 

최후의 만찬보다 훨씬 더 유명한 레오나르도의 작품을 꼽자면 모나리자-리자라는 이름을 가진 피렌체의 한 부인의 초상-일 것이다. 모나리자의 명성은 너무나 유명해서 우리는 여러 경로를 통해 이미 모나리자를 접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고정관념을 가진 채 그림을 보게 된다. 하지만 이런 고정관념을 버리고 새로운 눈으로 작품을 대할 때, 그 작품은 우리에게 미처 몰랐던 매력을 드러낼 것이다.

 

레오나르도-다-빈치의-모나리자
모나리자 - 레오나르도 다 빈치

 

그림을 딱 보았을 때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인물이 놀라울 정도로 살아있는 것 같이 느껴진다는 것이리라. 그녀는 마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우리의 눈앞에서 그 모습을 달리하는 것 같이 보인다. 사람의 장벽을 뚫고 루브르 박물관에서 원화를 보았을 때, 그 느낌은 정말 생생했다.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이 신비로운 효과가 어디서 비롯되었을지 궁금할 수밖에 없다. 자연의 위대한 관찰자인 레오나르도는 인간의 눈이 작품을 감상하는 데 어떤 작용을 하는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던 사람이었다. 자연을 자연 그대로 묘사하고자 했던 미술가들이 직면했던 문제, 즉 정확한 소묘를 조화로운 구성에 어떻게 결합해야 인물을 살아있는 것처럼 보이게 할 수 있을까에 대한 답을 레오나르도는 알고 있었다.

 

 

화가는 보는 사람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둬야 한다. 레오나르도는 윤곽을 확실하게 그리지 않고 마치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듯 희미하게 표현함으로써 인간을 조각상처럼 보이게 했던 기존의 문제를 해결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스푸마토이다. 하나의 형태가 다른 형태 속으로 뒤섞여 들어가게 만들어 보는 이로 하여금 무엇인가 상상할 여지를 주도록 희미한 윤곽선과 부드러운 색채를 이용하는 것을 말한다.

 

이 점을 알고, 다시 모나리자를 보면 우리는 레오나르도가 스푸마토 기법을 아주 세심하게 사용했음을 볼 수 있다. 레오나르도는 의도적으로 입과 눈 부분을 부드러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게 했고, 이는 우리가 모나리자의 표정을 확신할 수 없게 만들었다. 레오나르도는 작품 속에서 여러 정교한 트릭을 사용했고, 살아 있는 육체를 기적적으로 표현하여 자연 그대로의 묘사라는 틀에서 벗어남으로써 위대한 예술 작품을 탄생시켰다.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

 

16세기 이탈리아 미술을 빛낸 두 번째 피렌체 미술가는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다. 그의 긴 생애 동안 미술가의 지위는 완전히 변했고, 이러한 변화에는 분명 어느 정도 그의 공로도 있었다. 미켈란젤로도 젊은 시절 도메니코 기를란다요의 공방에 들어가 3년간 도제 생활을 했는데, 기를란다요는 당시의 화려한 생활을 반영하는 흥미로운 작품들을 남겼다. 인물들을 효과적으로 배치하여 눈을 즐겁게 해주는 방법을 알았던 기를란다요는 고대 미술의 테마를 좋아했으며 그림 속 이야기를 재미있게 담아낼 수 있는 미술가였다.

 

 

소년 미켈란젤로는 그의 공방에서 작업에 필요한 모든 기술과 기초를 배울 수 있었지만, 결정적으로 미술에 대한 이념이 달랐기에 공방을 나왔다. 미켈란젤로는 근육과 힘줄을 가지고 움직이는 아름다운 인체를 표현하는 방법을 알기 위해 고대 조각들을 연구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느낀 그는 인체의 비밀을 모두 알 때까지 인체 해부학에 관한 나름의 연구를 계속했다. 곧 이 젊은 미술가가 고대의 유명한 거장에게 필적할 뿐 아니라 그들을 능가한다는 소문이 퍼졌고, 30살이 될 무렵 미켈란젤로는 천재 레오나르도에 필적하는 거장 중 한 사람으로 인정받게 되었다.

 

교황의 부름을 거절한 미켈란젤로

 

교황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를 로마로 초청하여 자신의 영묘를 세워달라 요청했다. 그는 당장 카라라에 있는 유명한 대리석 채석창으로 가서 거대한 영묘를 장식할 대리석 석재들을 선별했다. 6개월 동안 채석장에서 대리석을 선별하는 데 시간을 보낸 그는, 로마로 돌아와 작업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위대한 사업에 대한 교황의 열정이 사그라들었음을 깨달았다. 이는 새로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신축하려는 계획과 영묘를 세우는 계획이 충돌했기 때문이었다. 실망에 빠진 미켈란젤로는 음모가 있다고 의심하기 시작했고 심지어 베드로 대성당의 신축 공사를 맡은 브라만테가 그를 독살하려 한다는 생각까지 하기 시작했다. 공포와 분노로 이성을 잃은 그는, 피렌체로 돌아가서 교황에게 자신을 원한다면 직접 찾아오라는 무례한 편지를 보냈다. 여기서 놀랄만한 점은 교황이 피렌체의 서장을 통해 이 젊은 조각가가 로마로 돌아오도록 설득하는 정식 협상을 했다는 점이다. 심지어 화를 내지도 않고. 적어도 이 사건에 관련된 사람들은 이 젊은 미술가의 거취나 계획이 국가적 문제에 버금간다고 생각했던 것이 분명하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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