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가의 구도와 소묘
에드가르 드가는 이러한 가능성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모네나 르누아르보다 다소 나이가 많았던 드가는 인상주의자들의 목표에 대부분 동감하면서도 그 그룹과는 약간 거리를 뒀다. 앵그르를 대단히 존경했던 그는 구도와 소묘에 지대한 관심이 있었다. 그의 초상화를 보면 가장 의외의 각도에서 본 공간과 입체감 나는 형태들의 인상을 전달하려고 한, 그의 의도를 알 수 있다. 확실히 그가 옥외 장면보다 발레 장면을 주제로 삼는 걸 좋아했던 이유를 미루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발레 연습 장면을 보며 매우 다양한 자세와 인간의 신체를 여러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었던 드가는 위에서 아래로 무대를 내려다보며 인체에 입체감을 주는 무대 조명의 효과와 미묘한 단축법을 연구했다.
그가 그린 파스텔 소묘 중 한 작품이다. 구도가 단순하지 않은 이 작품 속, 무희 중 몇몇은 다리만 보이고 또 다른 몇은 몸만 보인다. 그나마 완전한 모습을 보이는 단 한 인물의 포즈 또한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마찬가지이다. 드가의 그림에는 이야기가 없다. 그는 다만 인상주의자들이 자신을 둘러싼 풍경을 바라볼 때처럼 냉정한 객관성을 가지고 대상을 관찰한 것뿐이었다. 인간의 형체에 나타나는 빛과 그늘의 상호 작용, 운동감이나 공간감을 보여주는 방법만이 그에게 중요했다. 그는 아카데미의 관례를 고집하는 세계에, 젊은 미술가들의 새로운 이념들이 완벽한 소묘 솜씨와 가장 완벽한 구성의 대가만이 극복해낼 수 있는 새로운 문제를 제기하고 있음을 증명했다.
모더니즘의 불길이 옮겨붙은 조각
새로운 운동의 주된 이념은 회화에서 곧 조각으로 옮겨가 모더니즘의 찬반에 대한 열렬한 논쟁 속에 휘말렸다. 위대한 프랑스 조각가 오귀스트 로댕은 고전기 조각과 미켈란젤로의 열렬한 연구자였다. 그런 이유로 그와 전통 미술 간의 근본적인 충돌이 일어날 이유가 하나도 없었으나, 그런 그의 작품도 비평가들에게는 격렬한 논쟁의 대상이 되었고, 인상주의 반항아들의 작품으로 취급되기도 했다. 그의 초상 조각 중 하나를 살펴보며 그 이유를 알아보자. 다른 인상주의자들처럼 마무리된 외관을 혐오했던 그는, 자기 작품을 보는 사람들에게 상상할 여지를 남겨놓고 싶었다. 심지어 그는 형상이 막 나타나 모양이 갖추어지는 인상을 주기 위해 거친 돌의 일부를 그대로 남겨놓았다. 평범한 이들에게 이러한 그의 행위는 게으름이나 비정상적인 기벽 정도로 보였을 것이다. 그들에게 작품의 완성은 모든 것이 깔끔하고 매끄러워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로댕은 이러한 쓸데없는 인습들을 무시했고 작품의 완성은 미술가가 그의 목적을 달성할 때라고 주장한 렘브란트의 의견에 공감했다.
인상주의의 전파와 휘슬러
전 세계의 미술가들은 파리에 와서 인상주의와 접촉한 후, 부르주아 세계의 편견과 인습에 대한 저항을 익혀 고국으로 귀향했다. 프랑스 외의 지역에서 이러한 복음을 펼치는데, 가장 영향력 있었던 인물은 미국인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였다. 휘슬러는 1863년 마네와 함께 작품을 출품했고, 다른 인상파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일본 판화에 열광했다. 하지만 그는 엄격한 의미에서 인상주의자라 보기는 어려웠다. 그의 주된 관심사가 빛과 색채의 효과가 아닌 미묘한 색면의 구성에 있었기 때문으로, 그는 그저 파리의 화가들과, 일반 대중이 감상적인 일화에 보여주는 관심이 경멸스럽다는 점에 공감했다. 그는 회화에서 중요한 것은 주제를 색채와 형태들로 전이시키는 방식에 있다고 여겼다.
하지만 휘슬러는 도발적인 태도로 인해 은근하게 적을 만드는 것으로 악명을 떨쳤다. 런던에 이주한 그는 혼자서 현대 미술을 위해 싸워야 한다는 사명감을 느꼈고, 그림에 별난 제목을 붙이는 그의 습관과 아카데미의 전통을 무시하는 그의 태도는 곧 위대한 비평가 존 러스킨의 분노를 샀다. 1877년 휘슬러가 그린 일본풍의 야경화들을 향한 러스킨의 비난은 명예 훼손 소송으로 이어졌고, 이는 대중의 관점과 미술가의 관점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균열을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이 불행한 소송 사건의 원고와 피고, 모두 주변의 추악함과 천박함에 깊은 불만을 품고 있었다는 점을 볼 때 실제로 둘은 공통점이 매우 많았다. 다만 러스킨은 도덕성에 호소하여 미에 대해 환기하고 싶었던 반면, 휘슬러는 예술적 감각만이 인생에서 진정 논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보여주려 했던, 심미주의 운동을 주도했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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