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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19C 후반 고흐의 삶과 감정을 전하는 예술

by 행운지킴이 2022. 6. 3.

빈센트 반 고흐의 삶과 비극

 

1888년 겨울, 쇠라가 한창 파리에서 주목받고 있을 무렵, 남국의 강렬한 햇살과 색채를 찾아 파리를 떠나 남프랑스로 온 한 네덜란드 화가가 있었다. 그는 바로 빈센트 반 고흐였다. 반 고흐는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영국과 벨기에의 광산촌에서 전도사로 일할 만큼 신앙심이 깊었는데 밀레의 작품과 작품에 담긴 사회적 교훈에 감명받고는 화가가 되기로 결심했다. 그를 인상파 화가들에게 소개해 준 것은 그의 동생 테오였는데, 테오 역시 가난했지만, 항상 형 빈센트를 성심껏 도왔고 남프랑스의 아를로 가는 여비도 그가 마련해 주었다. 빈센트는 방해받지 않고 몇 년간 계속 그림을 그릴 수 있다면 언젠가는 그림을 팔아 동생에게 그 은혜를 갚을 날이 올 거라는 희망을 품고 있었다. 그의 모든 생각과 희망들은 동생에게 보낸 편지에 가득 담겨있다. 화가로서의 사명감, 그의 투쟁과 승리, 절망적인 고독, 타인과 관계를 맺고 싶은 간절한 열망, 고통스러운 작품의 제작 등, 이 모든 것들이 담긴 편지는 하나의 문학 작품으로 보아도 손색이 없을 정도이다. 하지만 아를에 온 지, 채 1년도 되지 않았을 때 고흐의 정신은 쇠약해져 마침내 발작을 일으켰다. 그리고 6개월 뒤, 정신병원에 들어가서도 정신이 맑아질 때면 그는 그림을 계속 그렸다. 하지만 고흐는 1년이 넘는 기간 고통에 시달린 나머지, 그는 결국 37세란 젊은 나이에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흐가 꿈꿨던 예술

 

그의 화가로서의 경력은 10년이 채 안 된다. 더욱이 그에게 명성을 가져다준 작품들은 정신적 고통과 절망에 빠져있었던 생의 마지막 3년간 그렸던 것들이었다. 고흐 자신이 간절히 원했던 대로 우리는 그가 그린 해바라기, 빈 의자, 사이프러스 나무, 몇몇 초상화들의 복제판을 흔히 볼 수 있게 되었다. 그는 그가 찬탄해 마지 않았던 일본 판화처럼 자신의 그림이 직접적이고 강렬한 효과를 지닐 수 있기를 원했고, 모든 평범한 사람들의 마음에 기쁨과 위안이 될 수 있는 소박한 예술을 꿈꿨다. 하지만 어떤 복제판도 완벽할 수는 없는 데다 값싼 복제품은 그의 작품을 실제보다 조잡하게 보이게 만들기도 하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 순간, 그의 원작을 들여다본다면, 우리는 강렬한 표현 속에서도 그의 예술이 얼마나 섬세하고 치밀한지를 깨닫게 된다.

 

고흐, 붓 자국으로 감정을 표현하다

 

고흐 역시 인상주의와 쇠라의 점묘법이 가지고 있는 교훈을 체득하고 있었다. 원색의 색점과 붓놀림으로 그림 그리는 것을 선호한 그였지만 그의 손을 거치자 인상주의자들이 의도했던 것과는 다른 무언가가 되었다. 고흐가 사용한 붓놀림은 단지 색채를 분할하기 위한 것을 넘어 자신의 격앙된 감정을 전달했다. 그는 글을 쓰듯 그림을 그렸고, 그의 붓 자국은 마치 글자체나 필적을 보고 쓴 사람의 심리 상태나 글 쓰는 자세를 유추하듯 그의 정신 상태를 읽을 수 있게 한다. 과거 어떤 화가도 고흐만큼 일관성 있게 효과적으로 이러한 기법을 구사하지는 못했다. 붓 자국은 그의 심리 상태를 전달하는 것이었기에, 고흐는 이러한 수법을 십분 발휘할 수 있도록, 붓으로 색칠하면서 소묘할 수 있고 두텁게 물감을 바를 수 있는 소재를 즐겨 그렸다. 그것이 그루터기와 관목들, 곡물 밭, 울퉁불퉁한 올리브 나뭇가지, 불꽃처럼 생긴 짙은 색의 사이프러스 나무의 아름다움에 처음으로 주목한 화가가 될 수 있었던 이유였다.

 

감정을 전달하는 그림을 그렸던 고흐

 

고흐는 자신을 태워 창작에 임했다. 찬란하게 빛나는 태양에서부터 보잘것없고 평온하며 소박한 사물들에 이르기까지 그가 그리고자 한 대상은 다양했다. 그는 동생 테오에게 보내는 편지에 아를에 있는 그의 좁은 하숙방을 그려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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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를의 반 고흐의 방 - 빈센트 반 고흐

고흐는 편지에 자신이 그림을 그리는 의도를 아주 분명히 설명했다. 자연을 사진처럼 정확하게 그리는 것에는 관심이 없으며, 자신이 그린 사물들에 대해 느낀 자신의 감정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하기 위해 색채와 형태를 사용했다는 것을 말이다. 자신의 목적에만 맞는다면 사물의 형태를 과장하거나 변화시키는 것도 개의치 않았다. 그 결과, 그는 전혀 다른 길을 이용했지만, 같은 시기 세잔이 도달했던 것과 비슷한 지점에 도달하게 되었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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