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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16C 초 독일과 네덜란드의 미술

by 행운지킴이 2022. 5. 2.

고딕 미술은 거의 도외시되었으나 새롭게 관심의 전면으로 떠오른 목적은 바로 고전 미술 속에 존재했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지닌 인체의 표현이었다. 뒤러는 실제 자연에 대해 꼼꼼하고 충실한 묘사만으로는 남유럽 미술 작품들을 돋보이게 하는 알 수 없는 아름다움의 요소들을 창조하는데 부족하다는 걸 깨달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이것이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다. 무엇이 인체의 아름다움을 만드는 것인가를 알기 위해 그는 확실한 법칙을 찾아 나섰다. 인체의 비율에 관한 고전 시대의 저술을 바탕으로 그는 여러 가지 비례의 법칙에 대해 실험을 했다. 그는 인체의 올바른 균형과 조화를 찾기 위해 인체를 일부러 왜곡시켰다. 그는 남유럽 미술의 이상을 북유럽의 토양에 이식하기 위한 최초의 시도를 했으나 그는 그렇게 쉽게 만족할 수 없었다.

 

뒤러는 견문을 넓히고 남유럽 미술의 비밀을 파헤치기 위해 베네치아로 여행을 떠났다. 이처럼 유명한 경쟁자를 베네치아의 군소 미술가들은 달가워하지 않았다. 그는 뉘른베르크 길드 조직의 엄격한 질서 속의 자신과 이탈리아 동료 미술가들이 누리는 자유를 비교하며 그 뚜렷한 차이를 뼈저리게 느꼈지만, 이후 뒤러의 생애는 달랐다. 그의 명성은 점점 퍼져나갔고 자신을 영광되게 하는 수단으로서 미술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던 막시밀리엥 황제는 뒤러를 고용했다. 그의 나이 50에 네덜란드를 방문했을 땐 제왕의 대우를 받을 정도가 되었다. 북유럽의 나라들에서도 마침내 손으로 일하는 사람들을 멸시하던 속물근성을 위대한 미술가들 자신의 힘으로 극복한 것이다.

 

그뤼네발트

 

위대함과 예술적인 기량에 있어서 뒤러와 비견할 수 있을 유일한 독일의 화가가, 이름조차 확실히 전해지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한 것은 사실이다. 17세기의 한 저술가는 마티아스 그뤼네발트라는 화가를 언급했지만, 당신의 기록이나 문서에는 같은 이름을 가진 화가가 언급된 것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는다. 하지만 동일한 작가가 그렸다고 믿어지는 작품들에는 통상 '그뤼네발트'라는 라벨이 붙여졌다.

 

뒤러는 자신이 자기 나라의 미술을 개혁하고 쇄신한 사람으로 자처했기 때문에 그의 습관, 신념, 취향과 표현의 매너리즘까지도 잘 알려져 있다. 반면 '그뤼네발트'를 그린 화가는 스스로 자신에게 어떤 이름이나 역할을 부여하지 않았기 때문에 신비로운 존재로 남아 있다. 그는 이탈리아 미술의 위대한 발견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가 생각하는 미술의 이념에 적합할 정도로만 그것들을 활용했다. 그에게 있어서 미술은 아름다움의 숨겨진 법칙을 찾는 데 목적이 있는 게 아니었다. 중세 시대, 모든 종교 미술의 목적인 그림으로 설교를 제공하고 교회가 가르친 진리를 선포하는, 단 하나의 목적이 있을 뿐이었다.

 

그뤼네발트의-그리스도의-부활
그리스도의 부활 - 그뤼네발트

 

이젠하임 제단화의 중앙 패널은 이 절대적인 목적을 위해 다른 모든 문제를 무시했음을 보여준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구세주의 뻣뻣하고 참혹한 모습에서 이탈리아 미술의 아름다움과 같은 것은 찾아볼 수 없다. 미술가는 제단을 바라보는 신도들이 성경의 말씀을 묵상할 수 있도록 세례 요한이 손으로 그 구절을 가리켜 강조했다. 이 그림은 무섭고 소름 끼치는 장면을 그대로 묘사한 것 같으면서도 인물상의 크기를 상당히 다르게 그려놓았다. 그뤼네발트는 르네상스 이래로 발전한 근대 미술의 법칙을 거부하고 인물들의 중요성에 따라 그 크기를 다르게 했던 중세와 원시 시대의 원칙을 의도적으로 사용한 것이다. 그뤼네발트의 작품은 이렇게 예술가는 진보적이지 않더라도 위대할 수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네덜란드의 미술가들

 

독일의 뒤러처럼 새로운 지식을 배우려 노력했던 네덜란드의 화가들은 옛 장식에 대한 집착과 새로운 것에 대한 애정 사이에서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 갈등으로 인해 북유럽과 이탈리아의 모델들이 가지고 있는 단순한 조화미를 잃어버렸기에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네덜란드의 미술가는 새로운 양식을 따르는 미술가들 가운데서가 아니라 독일의 그뤼네발트와 같이 남유럽의 새로운 물결에서도 중심을 지킨 미술가들 사이에서 찾아볼 수 있다. 히에로니무스 보스라고 불렸던 화가에 대해 알려진 것은 거의 없으나, 그뤼네발트와 마찬가지로 보스는, 현실을 가장 신빙성 있게 표현하기 위해서 발전되어 온 회화의 전통과 새로운 수법들이, 형이상학적인 세계를 현실성 있게 표현하는 수단이 될 수 있다는 발상의 전환을 보여주었다. 보스는 지옥의 광경을 소름 끼치게 묘사한 화가로 유명한데, 중세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괴롭히던 공포심을 구체적이고 실감 나는 형상으로 구현하는 데 성공한 미술가는 역사상 그 한 사람뿐일 것이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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