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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16C 후반 틴토레토와 엘 그레코의 미술

by 행운지킴이 2022. 5. 5.

틴토레토

 

16세기 미술가 중에서는 베네치아 출신의 야코포 로부스티, 통칭 틴토레토가 가장 뛰어난 사람이었다. 그도 역시 티치아노가 베네치아 사람들에게 보여준, 형태와 색채에서의 단순한 아름다움에 질려있었지만, 그는 단지 예외적인 것을 만들고 싶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에게 티치아노의 작품은 성경의 엄숙한 이야기와 성자들의 전설을 생생하게 느끼게 할 정도로 감동적이기보다는 쾌감을 느끼게 하는 부류의 그림이었다. 이것은 그가 성경의 이야기를 아주 다른 방식으로 보여줌으로써 보는 이로 하여금 그가 그린 사건의 긴장감과 극적인 분위기를 느낄 수 있게 하자는 결심을 하게 했다.

 

그가 그린 성 마르코의 유해를 알렉산드리아에서 베네치아로 옮겨왔던 이야기 중의 한 장면을 묘사한 것을 보면 그런 그의 결심을 확실히 알 수 있다. 당시의 사람들은 이 그림을 보고 아주 기묘한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극단적으로 대조되는 빛과 어둠, 원경과 근경 및 조화가 결여된 몸짓과 동작은 그들에게 생소한 충격을 가져다주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곧 이 엄청난 기적의 모습을 창조하기 위해 틴토레토가 더욱 평범한 방법을 사용할 수는 없었을 것이라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 틴토레토는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조르조네와 티치아노 같은 베네치아 화가들의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원숙한 색채의 아름다움까지 희생할수 밖에 없었다.

 

틴토레토의-용과-싸우는-성-게오르기우스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 - 틴토레토

 

'용과 싸우는 성 게오르기우스'를 보면 음산한 빛과 불안정한 색조가 어떻게 긴장감과 흥분된 감정을 고무시키는지를 보여준다. 공주는 그림 속에서 곧바로 우리를 향해 달려 나올 것 같이 보이지만 주인공인 성 게오르기우스는 주된 인물임에도 일반적인 규칙과는 반대로 배경에 멀리 들어가 있다.

 

당시 피렌체의 위대한 비평가이자 전기 작가인 조르조 바사리가 평가한 틴토레토는 이러했다.

 

만약 그가 정통적인 방법을 버리지 않고 선배들의 아름다운 양식을 따랐다면 베네치아에서 가장 유명한 화가들 가운데 한 사람이 되었을 것이다.

 

바사리는 용의주도하지 못한 제작 방법과 괴상한 취향이 틴토레토가 스스로 작품을 망쳤다고 생각했다. 사실 그러한 비난은 옛날부터 지금까지 새로운 시대의 미술가들을 공격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법이었다. 예술을 위한 혁신자들은 본질적인 것에만 집중하여 기법적인 완성도는 무시했는데, 틴토레토와 같은 시대에는 기법적인 탁월함이 아주 높은 수준에 도달한 상태였기 때문에 약간의 기계적인 소질만 있다면 누구나 그 기법을 익숙하게 통달할 수 있었다.

 

틴토레토와 같은 사람은 사물을 새로운 관점에서 보고자 했고 과거의 전설과 신화를 표현하는 새로운 방법을 탐구했다. 그는 그림의 완성이 전설적인 장면에 대해 본인이 상상한 바를 전달하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했다. 매끈하고 세심한 마무리 손질은 그의 목적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마무리 손질을 하지 않았고, 그것이 사람들에게 상상할 여지를 제공했다.

 

엘 그레코

 

16세기의 화가 중에서 그리스의 크레타섬 출신의 화가 도메니코스 테오토코풀로스, 통칭 엘 그레코는 틴토레토의 화법을 한층 더 밀고 나갔다. 그의 고향은 새로운 미술의 손길이 닿지 못한 고립된 지역이었고, 그림을 볼 때 그 묘사가 정확한지 가려내는 훈련을 받지 못한 그는 틴토레토의 예술을 충격을 받지도 않고 매혹적이라 느꼈을 것이다. 또한 그는 신앙심이 깊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성경의 이야기들을 새롭고 감동적으로 표현하고자 하는 충동이 생겼을 것이다. 그가 그의 미술을 발전시키는데, 정착지로 유럽의 외진 곳인 스페인의 톨레도를 선택한 것은 신의 한 수였다. 스페인에는 아직도 미술에 관한 중세의 이념이 사라지지 않았고 이것은 그가 자연적인 형태와 색채를 대담하게 무시하고, 감동적이고 극적인 환상을 강조하는 데 크게 도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의 한 장면을 묘사한 그의 작품을 보면 제아무리 정확하고 빈틈없는 소묘력을 가진 화가라 할지라도 성인들이 이 세상의 파괴를 요구하는 최후의 심판날의 무서운 광경을 그처럼 무시무시하고 실감 나게 표현하지는 못했을 것이란 생각을 하게 한다. 그는 틴토레토의 비정통적인 구성 방법과 파르미자니노의 인물을 길쭉하게 그리는 매너리즘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매너리즘의 지나치게 기교를 부린 미술은 스페인이 가진 분위기에 걸러졌다. 그의 작품은 믿기 어려울 만큼 현대적으로 보임에도 당시 스페인 사람들은 작품에 반감을 품지는 않았던 듯하다. 그의 작품은 항상 분주했다. 한 세대가 지난 후 그의 작품은 외면받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모든 미술 작품에 정확성이라는 동일한 기준을 적용하지 않게 되자 엘 그레코의 미술은 다시 발견되고 이해되기 시작했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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