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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59

18C 말~19C 초 고야와 블레이크, 풍경화의 인기 프란시스코 고야 다비드 세대의 미술가 중 위대한 스페인 화가 프란시스코 고야도 구태의연한 주제를 내버렸다. 고야는 엘 그레코와 벨라스케스를 배출한 스페인 회화의 훌륭한 전통을 익히고 있었으며 다비드와는 달리 고전주의적 장려함을 위해 이러한 지식을 거부하지도 않았다. 고야의 그림에서도 18세기 베네치아의 위대한 화가 조반니 바티스타 티에폴로가 사용한 얼굴 광채와 같은 표현이 보이지만 고야의 인물은 속한 세계가 달랐다. 사실 그에게 스페인 궁중에서의 지위를 얻게 해준 초상화들을 얼핏 보면, 반 다이크나 레이놀즈 부류의 어용 초상화 같기도 하다. 비단과 황금의 반짝임을 담고 있지만, 고야의 초상화에서 우리는 허영과 추악함, 탐욕과 공허함을 볼 수 있다. 후원자들을 이렇게 묘사한 궁정화가는 그가 처음일 것이다... 2022. 5. 21.
18C 말~19C 초 전시회의 시작과 전통의 이탈 전시회의 시작 바로 이 지점에서 문제가 발생했다. 아카데미에서 옛 거장들의 위대함을 강조하면 할수록 후원자들이 당대의 생존해 있는 화가들에게 그림을 의뢰하기보다 거장의 작품을 사게 했다. 아카데미는 대책을 세워야 했고 회원들의 작품을 매년 전시하기로 했다. 첫 시작은 파리에서, 그 후엔 런던이 그 장소가 될 예정이었다. 화가와 조각가들이 구매자를 찾기 위해 관심을 끌고, 작품을 제작해 전시하는 것은 우리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일이기 때문에, 그 당시 전시회를 연다는 개념을 얼마나 획기적인 일이었는지 와닿지 않을 것이다. 이런 연례 전시회들은 상류 사교계의 관심을 끄는 사회적 행사였고, 미술가들의 명성을 좌지우지할 힘을 가지게 되었다. 이제 미술가들은 성공적인 전시회를 위한 작품을 만들어야 했다. 화가들은 .. 2022. 5. 19.
18C 말~19C 초 프랑스 혁명과 미술 전통의 단절 르네상스 시대에 화가나 조각가가 된다는 것은 보통의 직업과는 다른 일종의 천직으로 별도로 취급됐다. 또한 종교 개혁으로 교회 성상에 대한 반대 운동이 일어나 유럽 전역에서 그림과 조각들이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어, 미술가들이 새로운 시장을 찾아 나선 시기이기도 했다. 그러나 이 모든 사건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불러오지는 않았다. 미술은 그 이후에도 여전히 유한계급의 생활 속에서 지극히 당연하고 자연스럽게 자리 잡고 있었고, 반드시 존재해야 하는 그런 것으로 여겨졌다. 유행의 변화 속에서도 대체로 회화와 조각의 목적은 전과 다름없었으며 그 누구도 이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이러한 미술의 목적이란 미술을 원하고 즐기려는 이들에게 아름다움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물론 유파들 간의 격렬한 논쟁은 존.. 2022. 5. 18.
18C 영국의 미술가 호가스와 레이놀즈 윌리엄 호가스 호가스는 청교도적인 전통에서 성장한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기 위해서는 예술이 분명한 목적, 즉 그림이 효용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권선징악적 내용을 담은 그림들을 그리기로 마음먹었다. 그는 이런 교화적 이야기를 그리는 데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었고, 이 일련의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림이 의미하는 바를 이해할 수 있었다. 사실 그의 그림은 일종의 무언극과 같다. 모든 등장인물은 주어진 임무에 맞는 제스처를 하고 무대의 소도구를 이용해 자신을 분명하게 드러낸다. 그는 얼굴뿐 아니라 옷차림, 행동을 통해서도 인물의 성격을 보여주려 노력했다. 사실 모든 중세 미술이 교훈을 가르치기 위해서 형상을 사용했고, 그림을 통해 설교하는 이러한 전통은 이미 대중 미.. 2022. 5. 17.
18C 신교와 영국의 엄격한 건축 규칙 신교와 가톨릭의 교회 건축의 차이 유럽의 가톨릭 국가에서는 17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바로크 운동이 절정에 달해 있었고, 신교 국가 역시 이 바로크 유행에 마냥 무관심할 수는 없었지만, 그것을 실제로 채택하지는 않았다. 심지어 영국의 왕정복고 시대, 스튜어트 왕조가 프랑스 쪽으로 기울어 청교도적인 취향과 세계관을 싫어했던 때조차 그랬다. 이 시기, 영국이 낳은 가장 위대한 건축가는 크리스토퍼 렌 경으로, 그는 1666년에 대화재를 입은 런던의 교회당들을 재건하는 임무를 맡았다. 렌의 세인트 폴 대성당은 보로미니의 교회당처럼 중앙의 둥근 지붕과 양쪽의 탑, 고대 신전의 정면을 연상시키는 정면 현관으로 구성되어 있지만 그 규모가 훨씬 크다. 확실히 둘 사이엔 유사성이 있고, 특히 2층의 그렇다. 하지만 이 .. 2022. 5. 16.
17C 말~18C 초 바로크와 로코코의 유행 17세기 유럽의 왕과 영주들도 로마 교회가 인간에게 감명을 주고 인간의 마음을 압도하는 예술의 힘을 발견한 것처럼 그들의 권력을 과시해 민중의 마음을 지배하고 싶어 했다. 또한 자신이 평범한 인간들보다 높은 자리에 있는, 신권에 의해 받들어진 다른 종류의 인간임을 보여주고자 했다. 특히 17세기 말의 가장 강력한 통치자였던 프랑스의 루이 14세는 왕권의 화려함과 영화를 과시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정책을 수립했다. 베르니니를 파리로 초빙하여 왕궁을 짓는 데 도움을 받으려는 계획은 무산되었으나 그의 또 다른 궁전은 절대 권력의 상징이 됐다. 바로 1660~1680년경에 세워진 베르사유 궁전이다. 바로크 양식과 건물 베르사유가 바로크 양식에 포함되는 것은 그 장식적인 세부 때문이 아니라 그 엄청난 규모 때문이다.. 2022. 5.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