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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17C 전반 바로크 양식과 매너리즘의 극복

by 행운지킴이 2022. 5. 7.

미술의 역사는 여러 양식이 계승되고 발전되는 이야기로 설명할 때가 많다. 12세기의 로마네스크 또는 노르만 양식이 어떻게 고딕 양식으로 이어졌는지, 그리고 고딕 양식을 대신해 들어선 르네상스 양식이 어떻게 15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시작해 유럽의 모든 나라에 퍼지게 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르네상스를 뒤이어 바로크 양식이 등장했는데, 그 이전의 양식들은 모두 뚜렷한 특징을 가지고 있어 식별하기가 쉬웠지만, 바로크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바로크 양식

 

사실 르네상스 이후로 거의 오늘날까지도 건축가들은 고전 시대의 유적에서 빌어온 기본 형태들을 사용해왔다. 그러나 건축에 대한 취향과 유행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많은 변화를 거쳐왔기에 이 변화하는 양식을 구분하기 위해 편의를 위해 양식마다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이러한 양식을 가리키는 어휘들 대부분이 그것이 처음 쓰인 당시에는 그것을 낮추어 평가하거나 조롱하는 의미로 사용됐고, 바로크라는 말도 마찬가지였다. 바로크는 17세기의 예술 경향에 대해 반감을 품었던 후대의 비평가들이 그것을 조롱하기 위해 사용한 말로, 그리스와 로마의 고전 건축의 형식에서 벗어난 고전 건축의 형식을 차용하거나 채택해서는 안 된다는 뜻으로 사용한 단어였다.

 

그들의 기준에서 고대 건축의 엄격한 규칙을 무시한 양식을 바로크라고 불렀으므로 우리가 이러한 구별을 평가하기란 대단히 어렵다. 우리는 이미 고전 건축의 규칙을 무시한 건물들에 익숙해졌고 무감각해졌기 때문이다. 하지만 처음 이러한 건물들이 세워졌던 당시에는 대단히 혁명적인 것이었다. 예수회 교단은 유럽 전역에 걸친 종교 개혁에 대항하여 싸우려는 드높은 기대를 걸고 교회를 새로 설립했고, 르네상스 방식인 원형의 대칭적 설계는 신에게 봉사하는 데 부적합하다고 여겨져 새롭고 단순하며 독창적인 설계가 유럽 전역에 퍼져나갔다. 주제단을 강조하는 장방형의 형태로 이루어진 중세 교회당의 특징과 크고 널찍한 내부를 장엄한 궁륭을 통해 흘러들어온 빛으로 강조하는 르네상스식 설계방식을 결합한 간결하고 독창적인 교회 설계 방식이었다.

 

로마의-일-제수-교회
로마의 일 제수 교회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설계한 일 제수 교회의 정면 현관은 자세히 살펴보면 왜 그 정면이 내부 못지않게 그 당시 사람들에게 얼마나 새롭고 독창적이었을 지 알 수 있다. 고전기 건축의 여러 요소로 이루어진 건물이지만 이 고전적인 요소들을 하나의 패턴으로 융합시킨 방식을 보면 로마나 그리스, 심지어 르네상스 건축법까지도 도외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기둥이나 반기둥을 모두 이중으로 만들어 전체 구조를 더욱 다채롭고 호화롭게 하면서도 장엄해 보이는 효과를 주려 했다는 점이다. 델라 포르타가 설계한 최초의 예수회 교회당의 정면에는 모든 부분이 하나의 커다랗고 복잡한 형태 속에 융합되어 전체적인 효과를 구성한다.

 

 

그는 고전 시대의 건축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일종의 소용돌이 형태를 사용했는데, 사실상 순수한 고전적 전통을 고수하는 사람들이 바로크 건축가들에게 퍼부었던 비난의 대부분은 이러한 곡선과 소용돌이무늬로 인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 장식물들은 그저 단순한 장식의 역할 그 이상이었다. 이러한 소용돌이 형태는 건물 전체에 일관성과 통일성을 부여했기 때문이다.

 

매너리즘에서 벗어난 회화

 

매너리즘에서 벗어나 회화가 더 풍부한 가능성을 지닌 양식으로 발전하게 된 과정은 여러모로 바로크 건축의 발달사와 비슷한 면이 있다. 17세기의 회화는 매너리즘 화가들의 양식을 단순하게 지속하려 하지 않았다. 당시 사람들은 미술이 매우 상투적인 방식에 빠졌고 거기에서 빨리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미술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즐겼는데 특히 로마에서 그런 경향이 두드러졌다. 로마의 교양있는 신사들은 당시 미술가들 사이의 다양한 동향이나 운동에 관해 토론하고 미술가들 사이의 다툼이나 음모에 가담하여 편들기를 즐겼다. 그리고 북부 이탈리아에서 로마로 건너와 정반대의 수법으로 작품을 제작하는 두 사람의 화가들에 대한 이야기가 그들의 주된 관심사로 떠올랐다. 한 사람은 볼로냐 출신의 안니발레 카라치, 또 한 사람은 밀라노 근처의 작은 마을 출신인 미켈란젤로 다 카라바초였다. 매너리즘에 진력이 났다는 것은 두 사람 모두 동일했지만 그 매너리즘의 기교를 극복하는 방법에 있어 둘은 매우 달랐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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