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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

16C 후반 북유럽 회화의 위기와 풍속화

by 행운지킴이 2022. 5. 6.

북유럽 회화의 위기

 

북쪽의 독일, 네덜란드, 영국과 같은 나라의 미술가들은 이탈리아나 스페인의 미술가들이 겪은 것보다 훨씬 더 심각한 위기에 봉착했다. 남유럽의 미술가들은 새롭고 놀라운 수법으로 그림을 그리는 문제에 골몰하면 됐지만, 북유럽은 달랐다. 북유럽에서는 회화가 존속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심각한 문제에 직면했다. 이 거대한 위기는 종교 개혁에 의해 초래되었는데 신교의 많은 교도가 교회 안에 성인들의 그림과 조각상을 두는 것을 반대하고 그것을 구교의 우상 숭배로 여겼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신교 지역에 사는 화가들은 그들의 가장 큰 수입원인 제단화를 그리는 일을 잃게 되었다. 그리하여 책의 삽화나 초상화를 그리는 일 정도가 화가들의 정상적인 수입원으로 남게 되었다.

 

이러한 위기의 영향을 이 시기의 가장 위대한 독일 화가인 한스 홀바인(아들)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데, 그는 뒤러보다는 스물여섯 살 아래이고 첼리니보다는 불과 세 살 위였다. 홀바인은 뒤러가 평생 정열적으로 추구했던 지식을 좀 더 손쉽게 습득했고, 화가 집안 출신인데다 매우 재빠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는 얼마 안 가 북유럽과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업적을 모두 섭렵했다. 독일어 사용권 나라에서 정상을 향한 길을 다지던 그는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 부딪혀 모든 희망을 잃게 되었고, 1526년에 위대한 학자인 에라스뮈스의 추천서를 받아 영국으로 갔다.

 

그는 결국 종교 개혁의 소용돌이에도 불구하고 영국에 정착했고, 헨리 8세로부터 궁정 화가라는 공식 직함을 받았다. 그는 더 이상 성모상을 그릴 수는 없었지만 궁정 화가가 해야 할 일은 매우 다양했고, 그의 주된 임무는 왕실의 초상화를 그리는 것이었다. 우리가 헨리 8세 시대의 남자와 여자들의 모습을 생생하게 알 수 있는 것은 홀바인의 끝없는 통찰력이 큰 역할을 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한스-홀바인의-리처드-사우스웰-경
리처드 사우스웰 경 - 한스 홀바인

 

헨리 8세의 신하로 수도원의 해체에 참여했던 관리 리처드 사우스웰 경의 초상화를 보면 드라마틱한 것도 눈길을 끌 만한 것도 없지만 모델의 마음과 인품이 그림에서 배어 나오는 것 같은 느낌을 받는다. 홀바인이 인물을 그림에 배치한 방법을 보면, 우리는 거장의 빈틈없는 솜씨를 통해 만든 완벽한 균형이, 그가 의도한 대로 보는 이가 인물을 아주 알기 쉽도록 유도한다는 걸 알 수 있다.

 

사실상 영국의 회화 중에서 종교 개혁의 회오리를 견딘 유일한 분야는 홀바인이 확고하게 다져놓은 초상화뿐이었고, 이마저도 남유럽의 매너리즘 취향이 나타나자 홀바인 풍의 간결한 양식 대신 귀족적인 세련미와 우아함이 선호되었다.

 

네덜란드의 풍속화

 

유럽의 신교 국가 중 종교 개혁이 부른 위기를 무사히 넘긴 유일한 나라는 네덜란드였다. 네덜란드에서는 오래전부터 회화가 번창하여 미술가들은 그들이 처한 곤경에서 빠져나갈 길을 발견했다. 그들은 신교 교회들이 반대하지 않을 주제를 찾아 그러한 모든 유형을 전문화했다. 더 이상 제단화나 기타 종교적인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어진 북유럽의 미술가들은 그들의 공인된 전문적 특기인 사물의 외관을 묘사하는 솜씨를 과시하는 그림을 그리려고 노력했다. 회화의 영역이 축소되자, 화가들은 전문화의 길을 더욱 매진했다. 특히 일상생활의 장면을 묘사한 그림들은 후에 풍속화라 불렸다.

 

16세기 플랑드르 최고의 풍속화가는 피터 브뢰헬로 그의 일상에 대한 것은 거의 알려진 것이 없다. 브뢰헬이 주로 그렸던 그림의 주제는 농민들의 생활이었다. 그는 농부들이 떠들썩하게 술잔치나 축제를 벌이고 일하는 모습을 즐겨 그렸다. 극작가나 화가들이 인간의 어리석음을 드러내 보이려고 할 때 하층민의 생활에서 그들의 주제를 구했던 것처럼 그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유쾌하지만 결코 단순하다고 할 수 없는 그림들에서 브뢰헬은 풍속화라는 미술의 새로운 왕국을 세웠고, 그 이후의 네덜란드 화가들이 이 왕국을 더 완벽하게 보완해나갔다.

 

프랑스에서는 이러한 미술의 위기가 다른 방향으로 돌파구를 찾았다. 이탈리아와 북유럽 나라들 사이에 위치한 프랑스는 양쪽의 영향을 모두 받았고, 프랑스 중세 미술의 전통이 처음에는 이탈리아 미술의 유입으로 위협을 받았다. 프랑스 화가들은 네덜란드 화가들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 미술을 도입하는 게 대단히 어렵다는 것을 알았고, 마침내 프랑스 상류 계급이 받아들인 이탈리아 양식은 세련되고 우아한 매너리즘 화가들의 양식이었다. 한 세대 뒤에 프랑스에서는 자크 칼로라는 화가가 이탈리아 매너리즘 화가들의 기발한 발상을 피터 브뢰헬의 정신으로 동판화에 표현했다. 그는 키가 크고 삐쩍 마른 인물들과 예기치 않은 광경을 아주 놀라운 방식으로 결합하길 좋아했고, 하층민의 생활 정경을 통해 인간의 어리석음을 표현하려 했다.

 

 

◎ 참고도서 - 서양미술사, 곰브리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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